오늘은 브루스 핑크 편, <2장. 주인 기표와 네 담론>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장 관련 글 참고, ① 주이상스 개념의 변화 과정, ② 주이상스와 4가지 증상과의 관계) 항상 느끼는 거지만 라캉은 정말 도식화의 달인인 듯 싶다. 복잡한 구조를 통합해 매우 간명한 방법으로 풀이해 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런 점이 많은 이들을 그의 이론으로 이끄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라캉은 핵심이 되는 담론을 네 가지로 압축했는데, 이 편에서 저자는 각 담론의 주된 특성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1. 담론의 정의
‘담론’은 라캉 정신분석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하지만 늘 어림짐작으로만 넘어가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사전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논의함[1]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이 단어는, 단순히 ‘말하기(발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눌 대상이 있는 상호주체적 태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 짚어볼 네 담론은 이런 사회적 관계의 네 가지 유형[2]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보시면 좋을 듯 싶다.
2. 담론의 구조와 구성 요소들
담론의 기본적인 구조는 아래와 같다. 각 담론의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행위자가 타자에게 무언가를 요구 (→, 말 건넴) 하는 것이 골자인데, 하단의 내용들은 담론에 따라 각각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런 구조적 틀 위에 4가지 핵심 요소 (수학소) 가 자리하게 된다.
S1 :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주인 기표
S2 : 체계적인 지식
$ : 분열된 주체
a : 잉여 향락
이와 같이 4개의 수학소를 통해 원칙적으로는 24개의 담론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만, 라캉은 자신의 특별한 배치, 즉 4개에 대해서만 담론의 지위를 부여하게 된다. 그 중 주인 담론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각 요소들을 반 시계 방향으로 이동시키면 각 담론의 도식을 불러올 수 있게 된다. 각 도식의 과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역사적 맥락에 기대는 것도 도움이 될 듯 싶다. 기본적으로 철학과 과학 (대학 담론) 은 진리 (주인 담론) 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해 왔으며, 정신분석의 탄생 (분석가 담론) 덕분에 비로소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이해의 길 (히스테리 담론) 이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네 가지 담론
3.1. 주인 담론
주인 담론은 무의식의 출발점이자 네 담론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애초에 이유를 불문하고 그저 따라야만 하는 그 무언가 (S1) 에 의해 예속된 존재 (S2) 이기 때문이다. 거울 단계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관련 글) 과정을 거치면서 분열된 주체가 욕망의 길로 나아가는 것처럼, 주인(S1)의 명령을 통해 우리는 지식(S2)으로 나아가고 잉여가치(a)를 생산해 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주인기표는 주체가 획득한 지식에 대해 알지 못하며 (권력 유지만 할 수 있으면 된다), 실은 주인 기표 본인도 분열되어 있다($)는 진리를 감추고 있다.
3.2. 대학 담론
대학 담론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체계적 지식(S2)이 주인기표(S1)를 진리의 자리에 모셔둔 채 잉여가치(a)를 창출할 방법을 찾고 이를 정당화, 합리화 한다. 이 과정의 생산물(결과)은 소외된 주체($)이다. 마치 끝없이 잉여가치 창출에만 골몰하는 (그로 인해 주체는 유행에 뒤쳐질 것을 두려워하는 소비적 객체로 전락한다) 자본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구조는, 주인담론을 합리화하는 과학과 철학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다만 프로이트를 따라 이 담론이 최악의 것이 되는 이유는 알고 있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억지로 설명하려는 태도, 즉 이해가 불가능한 실재의 논리적, 물리적 모순을 감당하려고 하기보다 이를 소진시켜버리려는 백과사전식 노력에 불과[3]하기 때문이다.
3.3. 히스테리 담론
한편 순서상 분석가 담론이 먼저 오는 것이 맞지만 대학 담론에 맞선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히스테리 담론이 먼저 언급될 필요가 있다. 히스테리 담론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분열된 주체($)이다. 그런데 그런 주체가 말을 거는 대상은 자신을 분열시킨 주인 기표(S1)이다. 즉, 지배적 위치에 있는 S1에게 지식(S2)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능력, 자질을 입증하라고 끊임없이 요구[4]하고 있는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에게 있어서 은폐된 진리는 잉여 향락(a), 즉 실재의 조각이다. 즉,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생겨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의미있는 방법을 찾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히스테리 담론이 지식이 최대치로 성애화 되었음을, 라캉이 S2의 자리에 ‘주이상스’를 위치시켰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5]
과학과 히스테리와의 관계
유일하게 담론으로 격상된 히스테리 도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지식을 향한 주체의 끝없는 갈망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초기의 라캉은 과학을 대학 담론에 연결시켰다. 하지만 진정한 과학은 히스테리 담론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봤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932년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 물리학자[6]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때문이었다. 그는 미립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불확정도가 높아지게 되며,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되면 위치의 불확정도가 높아지게 된다. 물체는 관측을 하는 그 순간에도 운동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6]이다. 이 때문에 그는 우리가 측량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를 설정하게 되고, 구조적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개념적 예외, 즉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이 존재함[7]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라캉이 진정한 과학을 히스테리 담론에 연결시킨 것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진리의 자리에 실재를 위치시킴으로써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다만 그로 인한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지식을 생산할 것을, 또 반대로 생산된 지식을 반증할 것을 계속해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분석이 히스테리 환자를 통해 탄생될 수 있었음을, 그러나 동시에 치료실에서 분석가의 지식과 방법이 부적합하다는 점 또한 드러내게 했다는 점도 알고 있다. 진정한 과학적 탐구, 즉 진리의 탐구란 이처럼 끝 없이 나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이러한 불가능성들은 대상a 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실재와 연관된다. 히스테리 담론에서 대상a 는 진리의 자리에 위치한다. 이것은 히스테리 담론의 진리,즉 그것의 은폐된 원동력이 실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리학 역시 진정한 과학적 정신 안에서 수행될 때 실재,말하자면 작동하지 않는 것,적합하지 않은 것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된다. 즉 그것은 결코 이론에 어떤 부족함도 없음을,이론이 모든 경우에 작용함을 입증하고자 이러한 역설과 모순을 교묘하게 덮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한 한 그와 같은 역설과 모순들을 최대한으로 수용한다.
p. 59
3.4. 분석가의 담론
마지막 담론은 분석가의 담론이다. 사실 시기적으로 네 담론 중 가장 마지막에 탄생했기 때문에 이어서 설명하는게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일인 듯 싶다. 여기에서 행위자인 분석가는 환자($)에게 욕망의 원인(a)으로 기능한다. 환자의 주인 기표(S1)는 의미화가 불가능한 지점에 멈춰 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말실수, 서투른, 의도적이지 않은 행위, 얼버무리는 말, 꿈 등)[8] 자신의 존재를 은연 중에 드러내게 된다. 한편 분석가의 진리(S2)는 대학 담론의 지식이 아닌 주체를 이해하는 지식이라고 보는게 적절할 듯 싶다. 아직 무의식에 머물러 있지만, 분명 주체가 존재해야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분석가의 임무는 주체의 주인기표를 다른 기표들과 연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8]이다. 즉 분석 과정 중에 반드시 발생할 저항(투사나 전이)을 방어(역전이)하기보다, 환자가 말하는 내용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통해 당시의 사람, 상황, 관계, 감정 등의 연관성을 재확립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다. 만약 분석가가 환자와 같은 자로 여겨진다면 그는 그저 상상적 타자에 머무를 것이다. 재판관이나 부모로 여겨진다면 상징적 대타자로 머물 것이다. 하지만 환자의 무의식적 원인으로 여겨질 경우 분석가는 실재적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9] 주체는 이해될 수 없었던 사건 (외상으로써의 실재) 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철저히 무능력하다). 하지만 분석 과정을 통해, 그의 질문을 통해 당시의 상황, 감정을 조금씩 불러내 당시의 상황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면 그의 증상은 한결 감당할 수 있을만한 것이 된다. 하지만 섣불리 증상의 소멸을 의도하지 말아야 할 것은, 후반기 라캉의 병증(sinthome)에 대한 깨달음처럼 증상 자체가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주이상스의 역할(분쇄시켜서는 안될 그의 우주)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라캉이 증상을 해독하고 풀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면, 1970년대 초반의 병증은 이러한 상징이 접근할 수 없는 쾌락의 핵을 가리키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10]
4. 히스테리 담론에 머물 수 있길
앞서 살펴본 것처럼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공부하면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학 담론과 히스테리 담론의 대립, 그리고 과학을 히스테리화한 것이었다. 지젝이 이야기한 것처럼 히스테리 환자가 숭고한 것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인 실재 때문에) 진리를 향한 지식의 추구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어느 시대고 대학 담론은 드러난 진리를 온전히 해석해냈다고 생각되었지만,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진리가 있다고 여기는 히스테리 환자의 증언을 통해 여지없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 보였다.
또 한편으로 재미있었던 점은 이러한 히스테리 담론의 구조가 배움을 향한 유대인들의 가르침 속에도 유사하게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비록 학술서적은 아니지만 최근 읽었던 유대인 관련 책들 (① 13세에 완성되는 유대인 자녀교육, ② 유대인 엄마는 장난감을 사지 않는다) 에서도 자신들의 배움의 목적이 대학 담론에 머무르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배움은 기존 이론, 질서를 따르기만 해 진리를 억누르는 것 (대학 담론적 태도) 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늘 의심하고 사고해 자기만의 이론을 새롭게 개척하는 것 (히스테리 담론적 태도) 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토라 (구약 성경) 를 향해서도 자신들의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그야말로 주인기표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태도를 통해 탈무드는 탄생할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새롭게 해석되면서 삶의 지혜가 풍성해지는 방향으로 유대인들은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싶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진실(S1)을 은폐한 채 지식의 껍데기로 무장(S2)하고 보다 많은 돈(a)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주류는 아닐지 모르겠다. 물론 히스테리적 주체만이 유일하게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땅히 의문을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머무는 곳이 곳곳에서 외면당한 주체들이 넘쳐나는 곳이 되지 않도록, 적어도 오늘의 교훈을 통해서 만큼은 나의 중심이 언제나 히스토리 담론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1] 네이버 국어사전, 담론
[2]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98
[3] p. 56
[4] p. 56
[5] p. 57
[6] 위키백과, 하이젠베르크
[7] p. 59
[8] p. 60
[9] p. 63
[10] p. 32 – 33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