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 1』 관련 이전 글들
1.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 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2. 거울단계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관통하는 팔루스
3. 라캉의 ‘아버지의 은유’와 가부장제의 의미
4.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5. 라캉적 분열의 의미와 공포증 사례 분석
6. 언어적 주체와 고정점 (누빔점)
7. 말하기(언표행위)의 중요성과 분석가의 개입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가끔씩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인물이 좋은 사례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필자는 의례히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그 연예인은 자신의 방송이 수십만명에게 보여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선택해야 하며, 촬영시간 동안만 노력하면 되니 그 사람의 평소의 삶도 그럴지는 알 수 없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좋은 사례로 쓰이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필자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 만큼은 누구의 말도 맞지 않을 것이다. 그저 타인의 이미지만 두고 펼친 상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 이미지, 심지어 영상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그의 인상적인 특징들, 즉 그의 표상들 뿐이다. 물론 단순하기 때문에 빠르게 이해할 수 있고 예측하기 쉬운 도구임에는 분명하나, 어디까지나 존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만큼 편견을 가질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표현 능력의 한계상 우리는 서로를 이런 식으로 밖에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간 ‘가상의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저자가 언표(말해진 것)를 언급할 때 ‘주체의 대리’, ‘담화의 질서 속 얼어붙은 나’, ‘가상 속으로 말려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 자아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나(자아)를 바라보는 방식은 어떨까? 타인을 이해하는 것보다 조금 더 구체적일 뿐,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이러한 상상적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아마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몇 가지 단어들로 나를 정의하는 것을 ‘상상적 객관화’라고 하는데,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일반적인 단어들로 나를 표현했지만 (객관화) 여전히 나를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상상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체가 여러 단어들(대리자들)로 스스로를 인식한 것을 ‘자아’라고 하며 이를 인식하는 구조 자체가 상상적이기 때문에 자아는 주체에 대한 몰인식 (오인) 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2. 타자를 통해 형성되는 자아
한편 아무리 스스로에 대한 오해(자아)라 하더라도 이런 자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반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지난 글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살펴보기) 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처럼 엄마와의 융합 관계 (거울단계) 이후 아버지를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욕망이 원초적으로 억압되면서 비로소 언어로 자신의 요구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예로 르네 스피츠의 연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연구라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텐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계 2차대전 이후 양육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신체적 돌봄을 받았음에도 ‘양육자와의 상호작용’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정신적 황폐화 및 생후 2년 내 30%에 달하는 사망율을 보였던 원인임을 밝혀낸 연구였다. [1] 저자는 인간의 이런 특성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타자가 이미 아이의 이미지에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아이가 감지하는 한에서만 아이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p. 200
어머니가 자신을 불러주고, 필요할 때 적절하게 반응 (초기에는 자신이 창조했다고 느끼게 되는) 하며, 애정을 듬뿍 담은 일련의 표현들이 이미지로 각인되었을 때 아이 스스로가 ‘내가 어떤 존재구나’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최초의 정체성을 형성한 이후에만 아이는 언어로써의 상징계에 접근, 곧 자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상상적 차원의 해방인 상징계의 접근이 주체가 원래 등록돼 있던 상상적 차원으로 더 깊이 나가도록 이끌어 준다는[2] 점이다. 어쩌면 이 설명만큼 언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 또 있을까?
3. L도식, 상호주체적 변증법
드디어 오늘의 핵심인 L도식이다.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신분석 기술(技術)에서의 자아』에 관한 1955년 5월 25일의 세미나에서 라깡이 도입한 도식[3]) 위 내용을 먼저 공유한 이유는 필자의 경우 앞선 부분이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식을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주체(S)와 대타자(A)는 원칙적으로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주체(S)는 언어적 한계에 따른 필연적인 오인으로 인해, 대타자(A, 거울단계에서는 어머니)는 원초적 억압을 통해 무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A → S는 언어의 벽[4], 즉 언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한다.
한편 (주체라고 인식하는) 자아(a)는 자신의 닮은 사람(a’)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상상적 과정(aa’)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는데, 나와 ‘닮은 사람’과 타인과 ‘닮은 사람’이 나누는 ‘귀먹은 대화(자아간의 상상적 교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S)는 말을 할 때마다 대타자(A)를 목표로 삼지만 언제나 반성을 통해 도달하는 것은 aa'(공허한 말)뿐이다. 자아의 상상적 작동으로 인해 진정한 주체의 그림자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4. 소외된 주체의 회복
살펴본 것처럼 상상적 구조 속에 놓여있는 자아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분석이라는 것은 이러한 공허한 말의 상태가 아닌 충만한 말로 넘어가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분석가는 자신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비어있는 거울[6]로 환자와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역할을 통해 주체는 분석가의 자아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알지도 못한채) 말하고 있었던 대타자를 다시금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분석은 주체로 하여금 언어의 벽의 다른 쪽에서 다른 주체와 만나도록 하는 진정한 말의 통로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기다리지 않았던 대답을 주고 분석의 종결점을 결정짓는 대타자, 진정한 대타자에 대한 주체의 마지막 관계이다.” – J. Lacan, 『세미나 2권: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신분석 기술(技術)에서의 자아』,1955년 5월 25 일 세미나,op. cit.,p. 286.
P. 206에서 재인용
따라서 프로이트의 유명한 공식, ‘Wo Es war, soll Ich Werden’은 자아심리학적 방식인 ‘자아가 이드를 내쫓아야 한다.‘ 가 아니라 ‘이드가 있던 곳에 내가 존재해야 한다.'[7], 즉 위의 도식에서 이드 = 주체(Es)S 라고 표현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상상적 자아가 가리우고 있던 진정한 욕망이 회복될 수 있도록 그 자리를 점차적으로 옮겨야 (점진적 전치) 하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언어를 통해 상징계로 진입했다고 여기지만, 한편으로 글을 쓰고 나니 이 불완전한 상징은 다시금 우리의 근원적인 상상을 이해하기 위한 충실한 노예에 다름 아닌 듯 싶다. 과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분명 드러난 현상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유를 따져 들어가 보면 결국 모든 것은 상상만 가능할 뿐이지 않을까? 왜 우주는, 왜 지구는, 왜 중력은, 왜 인간은… 어쩌면 그저 상상만이 가능할 뿐인 우리는 과학의 발전이라는 지극히 작은 이해를 토대로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한 대타자를 사실상 포기해 버린채 ‘전 인류의 환자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실상 지젝이나 바디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우려하듯 정신줄을 놓은 자본주의적 욕망은 그 자체로 증상으로써의 자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에 있어 라캉적 의미의 분석가란 어떤 방식으로 개개인의 진정한 주체성을 드러내도록 해야할지, 글을 정리하면서 오히려 생각이 많아진 시간이었다.
[1] 자아심리학 – 르네 스피츠, 네이버 블로그
[2]
주체로 하여금 상상적 차원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는 상징계로의 접근은, 그 주체가 원래 등록되어 있는 곳인 상상적 차원 속으로 더 깊이 나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주체를 상상적 포획으로부터 해방시킨다. p. 197
[3] p. 202
[4] p. 203
[5] p. 205
[6] p. 206
[7] p. 207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