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 1』 관련 이전 글들
1.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 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2. 거울단계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관통하는 팔루스
3. 라캉의 ‘아버지의 은유’와 가부장제의 의미
4.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5. 라캉적 분열의 의미와 공포증 사례 분석
6. 언어적 주체와 고정점 (누빔점)
1. 언표와 언표행위
상징적, 언어적 분열 과정을 통해 무의식은 성공적으로 억압되고 욕망이 탄생되지만, 우리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그저 ‘일부 ($)’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이전 글을 통해 정리해 본 내용이었다. 하지만 분열 작업은 단지 기호의 수준(기표와 기의)에서 중단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그렇게 획득하게 된 언어를 타인에게 ‘표현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말하기(언표행위)와 말해진 것(언표) 사이에서의 분열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말하기(언표행위)를 통해 어떤 메시지(언표)를 전달한다. 둘의 역할이 구분되는 것처럼, 정의 또한 서로 다르게 내리는건 분명 적절한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굳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왜 그런걸까?
이 둘을 ‘분명하게’ 나눠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이게 정말 별도로 다뤄야 할만큼 중요한 사안인 걸까? 사실 이 내용을 정리하는게 필요한지 여부를 두고 계속해서 고민이 되었다. (크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은데 이해하려니 영 어려운) 다만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는 담화 과정은 주체의 생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 특히나 정신분석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 필요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2. 분석가의 태도
그럼 말이 나온 김에 곧바로 분석가가 취해야 할 태도로 넘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저자가 언표와 언표행위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은, 둘 간의 대립이 치료와 관련된 중요한 태도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분석가는 말해진 것 (언표) 속에서 조직되는 기의를 넘어 말하기 (언표행위) 를 통해 등장하는 기표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1]고 표현한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알쏭달쏭한 표현인데, 말해진 것의 기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개인적 판단의 성향, 이견이 발동하게 되는 습관적인 동인들을 가능한 한 중지시키는 것[2]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선입견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환자의 이야기 속 특정 요소에 미리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도록 해 분석가 자신의 무의식적 활동을 촉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집중하지 않는 주목[3]이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한 이같은 분석가의 기술적 태도는 자유연상으로 상담에 임하는 환자를 위한 가장 적절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중간에 그 어떠한 판단도 개입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① 분석가가 자기 무의식적 동기의 영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② 모든 요소들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요소를 통해 개입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무의식이 언표행위 과정을 통해 주체의 담화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는 주목은 언표와 그 언표의 주체의 차원에서 특히 주목하지 않는 것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예리한 듣기는 말하기의 차원으로 이끌어간다. 환자의 무의식에 분석가 자신의 무의식을 ‘연결하는 것(brancher)’이 중요하다. 따라서 분석가는 말해진 것 속에서 조직되는 기의를 넘어서 말하기를 통해 도래하는 기표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p. 194
사실 책을 읽으면서도 마치 외국어를 읽는 듯 번역을 하면서 이해해야 되는데 풀이해 보자면 이렇다.
“무의식은 환자의 대화 속 말하기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는 주목의 방식은 말해진 것과, 그 안에서 주체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리한 듣기는 말하기를 강화시킨다. 환자의 무의식에 분석가 자신의 무의식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분석가는 말해진 것 속에서 만들어지는 의미를 넘어서서 말하기를 통해 드러나는 기표들에 집중해야 한다.” (사실 풀이해놓고 봐도 어렵다..)
2.1. 분석가가 집중해야 하는 것
분석가는 특정 내용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부분을 놓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집중하지 않는) 환자의 이야기 자체에 귀를 기울여야 (주목)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듯 언제나 증상을 결정짓는 건 기표의 질서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 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야기하는 특정 요소는 대체된 기표 아래로 성공적으로 억압 – 무의식적이 – 된다). 따라서 예리한 듣기란 환자와의 공감대가 높은 상태를 전제로, 환자의 말하기 자체에만, 생성되는 기표에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말의 행렬을 놓고 보자면 대화를 통해 분석가가 알 수 있는 것은 억압/결합된 내용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말실수, 공포증의 경우 두려움을 야기하는 특정 기표 등 무의식의 조각들 뿐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아는 것은 분석가 자신의 의지를 통해 알아내는 것 (교조적으로 이끄는 것) 이 아니라 환자가 인도하는 것에 달려 있다. 즉, 분석의 주인 (분석 주체) 은 철저히 환자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핵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아래의 내용이 완성된다. 무의식, 욕망의 주체는 언표행위의 주체, 즉 말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물론 주체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 등장하자마자 그 자신이 아닌 것 (말해진 것, 그저 주체를 대리할 뿐인 언표) 이 되어버린다. 즉, 말하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 진리를 ‘잠깐’ 드러내고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분석가가 언표가 아닌 언표행위에 집중해야 된다는 것, 그 둘이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고 저자가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2.2. 분석가의 개입과 해석
그렇다면 분석가는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 분명 주체의 말하기에 집중하지만 어떠한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기에 그의 무의식과 함께 춤을 추는 분석가는 개입의 시점을 잡기 어렵게 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분석가가 들을 때 말하기 자체에 집중했던 것처럼, 환자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만 분석적 개입을 해야 한다고 (기표들의 질서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환자가 어떤 기표에 대해 닫혀 있음을 발견할 때, 즉 탈출구가 없는 오판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이를 단절시켜주는 표현(절분법)을 통해 그 기표를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단절 시도는 환자의 무의식적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한 언어 작용으로, 환자가 제공한 재료로 구성한 해법 제시와는 다르며, 설명적 해석이 무용하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된다.
한편 이 책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전에 리뷰했던 그의 다른 저작 『프로이트 · 라깡 정신분석 임상』 에서는 위 문제를 조금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개입과 해석 (위의 분석적 개입에 해당) 의 구분이 그것인데, 관련 내용을 잠깐 끌어 오자면 개입은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고 주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만 남겨주는 것이다. 즉, 상담회기 내내 지속되는 분석가의 일관성있는 태도인 것이다. 이 때는 어떠한 설명도, 환상의 의미도 드러내지 않는다. 해석은 앞서 ‘분석적 개입’을 설명한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도 분석가는 ‘그의 말을 인용해 (기표의 질서에 한정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속적이기만 했던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어 주체를 분열시키게 된다. 다만 이러한 해석은 환자의 요구에 대한 분석가의 응답으로 환원 (분석가의 이상화로 인한 주체성의 종속) 될 수 있으므로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늘 염두해야 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의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프로이트식의 ‘무의식의 의식화’ 는 불가능하다. 이는 무서운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언어, 즉 지식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해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유발시키는 증상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팔자’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곤궁은 나를 둘러싼 왜곡된 믿음, 이를 나타내는 (주관적으로) 유의미한 기표를 통해 강화되며 현실에 대한 대응 능력을 지속적으로 감소시킬 수 밖에 없다. 저자가 주의를 준 것처럼 이러한 내용을 섣불리 사회적 관점으로 확대해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겠지만, 오늘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 현상들을 보자면, 무의식적 증상의 발현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보게 되는 듯 싶다. 그런 점에서 진리를 향한 귀한 책들을 소개하는 필자의 작은 시도가, 의미의 회복을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자리잡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필자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럴 생각도 없지만)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p. 194
[2] p. 192
[3] p. 193
* 표지 이미지 출처 : px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