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유토피아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논문을 정리한 것이다. 이전 글에서 ‘갈등을 제거하는’ 유토피아적 환상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모순 속에서 우연히 출현하는 주이상스적 주체를 긍정1필자의 블로그, 유토피아 환상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판했다면, 지젝은 이를 구체화 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른 바 ‘다른 차원의 환상’이란 것으로, 그 정의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그의 주장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환상의 기본 구조
라캉은 환상을 $ ◇ a 로 정의한 바 있다.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해 분열된 주체($)가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a)에 동일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2필자의 블로그, 나지오의 라캉 강의 4강. 환상 강의를 통해 살펴 본 나의 환상이다. 지젝은 환상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질투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질투심을 느낄 때 내가 배제된 상태에서 만족감을 누리고 있는 상대의 모습 (유토피아) 을 상상한다. 이 때 ‘관찰자로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는 환상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라캉은 이를 ‘불가능한 응시’라고 표현한 바 있다.
자신을 비존재의 상태로 놓아두는 환상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시기 아이가 갖게 되는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한 주체 (엄마, 아빠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가 자신이 소멸되는 환상 (내가 죽거나 사라진다면 엄마, 아빠는 어떻게 행동할까?) 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이런 환상은 성인의 세계에서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지젝은 ‘과도한 만족을 누리는 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자들의 환상, 게이나 레즈비언의 낯선 성행위에 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예로 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 쾌락을 전유하는 부자들의 삶을 상상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2. ‘환상을 넘어선 환상’의 의미
그러나 지젝은 이런 1차원적인 환상을 넘어선 환상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 환상은 ‘만약에’라는 형식을 띄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바뀌게 될지를 상상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설명처럼 (미래의) 열린 선택지를 과거에 재도입 해, 과정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고 어떤 필요와 우발적인 조건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내는 것 말이다. 간단히 말해 충동적인 환상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환상, 즉 회고(retrospective)라 부를만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에 대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역사서술이 맡은 과제는 그 사건을 실제 일어난 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현실로 드러났던 숨겨진 잠재성(유토피아적 해방의 잠재성)과 그 최종적 결과(공리주의적 시장자본주의의 성장)를 파헤쳐내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논지는 이 배반당한 급진주의적 해방의 잠재력이 지속적으로 고집스럽게 남아서 역사적 유령으로서 혁명적 기억에 출몰해서 재상연되기를 요구하고, 이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통해 이 유령들이 모두 구원되어 편히 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유령들이 바로 환상을 넘어선 공상의 유토피아 장소이다. 유령성의 형식으로 지속되는 과거의 대안적 형태들은 역사적 과정에서 존재론적 ‘열림’을 구성한다.
「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 슬라보예 지젝, p. 30
프랑스혁명의 결과가 고작 시장자본주의였다는, 촛불시위의 결과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암담한 현실에 매몰되기보다, ①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진실을 요구하는 우리 안의 유령이 무엇인지), ② 어떤 대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적극적으로 상상해보라는 주문이었다.
3. 인간 자유의 필수 조건, 우발성
지젝은 더 나아가 이런 환상만이 우리에게 ‘존재론적 열림’을 제공해 진정한 자유를 안겨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숙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시각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은 우발적이고 대안적인 현실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보여준다.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 리처드 파인먼의 고백처럼 말이다. 이런 관점은 역사적으로 마주하기 어려운 결정적인 순간을 감지하고 혁명을 제안했던 레닌의 사례를 지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진다. 지젝은 예수의 희생이 기독교식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도, 법적인 몸값을 지불하기 위함도 아니었다고 일축한다. 그보다는 자유 자체에 초점을 맞춰 그의 행위가 우리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열림을 시행시켰다고 설명한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 노예가 된 우리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끝까지 (죽음까지 감당) 보여줌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3.1. 근대 과학의 전제, 주의주의
그러나 ‘실현된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기독교는 오히려 자유의 길로 나가지 못한다. 지젝은 지난 2006년, 교황 베네딕트 14세의 조지 코인 바티칸 기상대 감독 해임을 예로 든다. 당시 조지 코인 신부는 무계획, 무작위,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다윈의 진화론이 기독교와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해 해임되었다고 한다. 이 때 교황의 이성이란 진화 과정을 신이 이끈다고 보는 ‘전근대적 목적론적 이성’으로, 이는 근대 과학의 탄생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기독교 신학을 무화시키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가 정식화 한 주의주의3위키피디아, 주의주의 :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 또는 의지주의(意志主義), 주의설(主意說)은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립하여 의지가 지성(知性 :悟性)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상의 입장이다. 관념론 철학의 세계관으로서, 의지라는 정신적 작용이 세계의 근본적인 원리이며 이것으로 세계가 만들어지고 온갖 것이 나타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는 의지를 비합리적·맹목적으로 발동한다고 보는 것과 의지는 일정한 목적 아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고 보는 두 견해가 있다.는 신은 어떤 영구적인 합리적 진실로 담아낼 수 없다는 인식론적 한계를 출발점 삼는다. 사실성을 순수하게 기술한다는 과학담론이 환상인 것은, 모든 사실성의 저변에는 자의적인 신성의 의지에 의해 현상이 유지된다고 하는 조건 (법칙) 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는 신성의 의지가 아닌 것이 없으나, 그 중에서도 ‘신성의 모호한 질서를 찾을 수 없는’, 2+2=4라는 기초적인 수학적 사실들을 통해 근대 과학의 토대를 구축한다.
현대 과학으로 넘어와서도 이러한 관점은 지속된다.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로 당대에 가장 널리 알려졌던 스티븐 제이 굴드4위키피디아, 스티븐 제이 굴드는 “삶의 영화를 되감아 재상연하면 진화의 역사는 현재와 완전히 다를 것”이라며 예정론에 반기를 든다 (지젝은 이런 그를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라고 표현한다). 지젝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역사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역할’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유사한 역할 했을 것이라는 주장) 을 비판하며 같은 입장에 선다.
3.2.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차이
애초 베네딕트 14세 비판의 출발점은 그의 이슬람교 비판에 대한 논란이었다. 그는 14세기 비잔틴 황제의 악명 높은 발언을 인용 – 무하마드가 가져온 것은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그는 자신이 설파하는 신앙을 칼로 전하라 명령했다는 주장 – 하며 ① 이슬람교를 비판했다고 한다. 동시에 ② 서구의 ‘신이 부재한 세속주의’도 비판하며, 이성의 신성한 능력이 ‘절대주의적 교리’로 축소되고 일그러졌음을 지적한다. 여기에 대한 교황의 주장은 ‘비이성적인 신’과 ‘신의 부재’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진정한 이성 (이성과 신앙의 새로운 만남) 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교황의 이성이 ‘전근대적 목적론적 이성’임을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교황은 이슬람교가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는데, 지젝은 이슬람교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사랑의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덧붙인다. 이슬람교의 신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진정한 이성의 신 (모든 것을 알고 관장하며, 땅 위에 개입할 필요가 없는 최고 창조자) 이다. 반면 사랑에 집중하는 기독교의 신은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예수는 자신의 창조 질서에 직접 개입해 열정과 수난을 당함으로써, ‘창조주이자 우주의 지배자’라고 하는 모든 종교에 보편적인 신관을 넘어 선 것이다.
따라서 ① 교황이 비판하는 이슬람교야 말로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합리적 이성의 종교이며, ② 비합리적인 예외 (헤아릴 수 없는 신성의 미스터리) 를 승인한 기독교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합리성을 지킬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지젝의 숨은 의도는 교황이 은밀한 이슬람교도라는 것이다.
3.3. 신성모독적인 기독교의 신
그는 여기에 더해 체스터턴을 인용해 구약성서 욥기에서 드러난 기독교 신의 모호성을 현대 과학, 그리고 정신분석과 연결시키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욥은 구약성서의 수 많은 인물 중 유일하게 신의 의지에 홀로 맞섰던 인물이다. 당대의 의인으로 평가받던 그는 모든 부와 가족, 그리고 건강마저 잃은 채 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도구에 불과한 인간의 의지를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며, 신의 더 높은 의지란 과연 장대하고 선량한 것이냐고 말이다. 그러나 신은 여기에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받은 (엉뚱한) 답변은 질문을 더욱 수수께끼로 만든다. 세상에 대한 ‘총체적 앎’이란 가르침 대신, 신 자신이 오히려 욥의 생각보다 세상이 더 이상하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직도 전능한 자와 다투겠느냐? 나 하나님을 책망하는 너는 이제 대답하라.”… 너는 네가 의롭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내 심판을 무시하고 나를 죄인으로 단정할 셈이냐? 네가 나 같은 팔을 가졌으며 나만큼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 “너는 하마처럼 생긴 괴물을 보아라. 내가 너를 창조했듯이 그것도 창조하였다. 그 괴물은 소처럼 풀을 먹고 살지마는 이것은 내가 창조한 것 중에서 가장 무서운 놈이다. 그것을 창조한 나도 칼을 들어야만 접근할 수 있다.”… “그 괴물을 건드릴 만큼 용맹 있는 자가 없는데 누가 감히 나를 당해 낼 수 있겠느냐?”
욥기 40:1-2, 8-9, 15, 19, 41:10 KLB
자칫 동문서답 같은 신의 대답의 핵심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멋진 것은, 적어도 인간에 관한 한, 그게 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뜻밖에도 욥은 여호와의 발언 이전에는 위로를 얻지 못하다가 그의 발언 후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주께서는 저에게 ‘이제 너는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너는 나에게 대답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욥기 42:4-6 KLB
지젝은 욥에게 나타난 신의 ‘수수께끼 이중 강화’ 방식이 신성모독 (신이 자신의 창조를 설명하지 못함) 적 신임을, 바로 이 신성모독적 신이야말로 근대과학의 신임을 분명히 한다. 근대과학은 아주 명백한 것들에 대해서도 경탄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에서 분석가가 취해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나지오의 설명처럼 분석가가 ’놀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안다고 가정된 주체’가 아니라 ‘수수께끼적 대상 a’임을 발견할 때)‘ 분석수행자로서 환자는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전부 아닌(not all)’ 이란 개념은 이런 결론을 함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합리성을 벗어나는 비이성적인 것이 있음‘ (폭력적인 예외의 논리) 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것이 ‘전부가 아닌 합리성’ 자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위반적 환상으로써 공산주의가 반드시 필요5필자의 블로그, 타인의 환상을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한 것처럼, 과학적 사회주의 (역사유물론의 과학) 는 유토피아 사회주의 (메시아적 구원을 담고 있는 신학) 없이 버틸 수 없다.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인 인간은 그 자신의 본질적인 자유를 자각함으로써 순수한 호기심의 과학으로, 사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함으로써 환상 너머의 환상으로 나가야 한다.
4. 열린 가능성에 대한 믿음
모태 기독교인인 필자는 기독교인이 즐겨 사용하는 ‘예비하심 (여호와 이레)’이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이 하셨다‘고 보는 모범적인 신앙인으로서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기독교 내에서 이미 상투어처럼 자리잡은 이런 고백이 ‘진심인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진심이란 ‘하나님이 해주셨다는 것을 정말 믿느냐’는 차원이라기 보다는, 정말 그 해석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느냐는 것, 즉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때마다 귀한 분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그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음을,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것이다. 하지만 신의 모호성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 근대 과학의 토대를 세웠던 데카르트처럼, 주어진 모든 은혜 속에서 나의 노력으로 일군 것 또한 존중해 줄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분명 무한한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찾아나서고 획득하는 것은 개인의 끈질긴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겨우 닿을까 말까 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구원론이 자력이 아닌 전적인 타력임을 인정함에도 말이다). 어쩌면 이런 ‘열린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도외시 한 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수동성에 머무는 것을 합리화 (하나님이 해주시겠지, 또는 어차피 말세니까 천국만 바라야지) 시켜, 세상에 대한 충분한 책임의식을 갖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지젝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자유의 열림으로 해석하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인 것에 깊이 공감이 갔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교황의 예정론에 반대한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 진정한 호기심을 유지하고 나아가려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철저히 의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불성실한 답변이 자동적으로 나와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을 그 어떤 예정론적 불씨마저도 꺼뜨리고 온전히 제로(0)인 상태, 말 그대로 100% 열린 가능성을 염두한 가운데 사유 실험을 진행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 떠오르는 환상을 붙잡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를 발견할 수 있는 길임을 잘 알려준 글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불만, 분명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일임에도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싹을 틔우는 자리라는 것, 라캉이 증상과의 동일시라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환상을 일으킨 증상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더 깊숙이 자신의 환상 속에 침잠하여 독특한 주체성을 향유하라는 것 말이다.
『유토피아』 전체 글 목록
1. 유토피아 환상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판, 「투셰와 유토피아」, 라이언 앤소니 해치 편
2. 상상의 가능성을 연 기독교적 자유, 「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 슬라보예 지젝
3.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위기와 혁명이 반복되는 이유, 「반복과 혁명」, 가라타니 고진
* 표지 이미지 출처 : DA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