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 1』 관련 이전 글들
1.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 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2. 거울단계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관통하는 팔루스
3. 라캉의 ‘아버지의 은유’와 가부장제의 의미
4.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5. 라캉적 분열의 의미와 공포증 사례 분석
이전 글에서는 라캉에게 있어 ‘분열’은 ‘주체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정리해 보았다. 어머니와의 2자 관계에서 아버지의 등장으로 인한 상징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기표(청각 이미지)와 기의(의미)로 분절되는 언어의 속성상 주체는 결코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으며, 공포증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자신에게 드러난 증상의 원인에 대해서도 (분석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 주체를 등장시킨 언어의 의미
결국 이러한 상징적, 언어적 차원의 분열 결과로 주체는 소외된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만 마치 대명사(사람, 사물 이름 대신 나타내는 말)처럼 상징적으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되는 즉시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가 흥미롭게 설명하듯 언어의 근본적인 특성이 현재 여기에 없는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 즉 부재로 이루어진 현존인 말[1] 을 통해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자체가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언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가 무의식의 원인이자 주체의 원인이라는 것은 이러한 상징적, 언어적 결여를 통해서만 욕망의 주체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각 단계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듯 싶다.
언어 (기표의 질서) → 분열 → 억압된 무의식 → 욕망의 주체 → 언어 (요구)
이러한 사고 (언어가 무의식의 원인이라고 하는) 는 당시 정신분석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고 한다.
라깡에 따르면 주체가 분열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주체는 말하는 존재로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그것은 주체의 원인(cause)은 무의식의 도래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주체의 분열은 무의식을 도래하도록 만드는 분열 과정 속에서 주체를 구조지음으로써 주체를 발생시키는[주체의 원인이 되는]기표의 질서라는 것이다.
라깡 작업의 근본적인 논제들은 동시대의 정신분석적 사고에 결정적 단절을 가져왔다. ‘무의식’이라는 주제에 관해 앙리 에(H. Ey)가 조직한 유명한 1960년의 본느발 학회(colloque de Bonneval)에서 이루어진 논쟁이 그 예이다. 이 학회에서 라플랑슈는 언어의 조건으로서의 무의식이라는 논제를 주장함으로써 [라깡의 이론과]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며 이에 라깡은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개입한다.
pp. 168 – 9
사실 그냥 생각해 보면 라캉의 언어학과 관련한 독창적인 해석이 없었다면, 무의식이 언어의 조건이라는 라플랑슈의 주장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스트레스가 설명될 수 없는 많은 병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무의식의 출현과 관련한 구조화를 마친 라캉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주류 세력과의 지난한 싸움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2. 고정점 (누빔점) 과 기표 사슬
한편 이러한 언어의 작용도 ‘시간의 흐름(통시적)’에 따라 규정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가 말을 마치기 전까지는 이미 언급된 표현들이 정확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각각의 기표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후성’을 나타내는 것이 라캉의 ‘고정점’이 갖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위 도식은 문장 속 기표의 사슬 (SS’) 의 흐름 가운데서 고정점이라고 하는 갈고리를 채워 (△$ )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기표의 질서로 인해 등장한 주체는 이처럼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데, 앞서 대명사를 예로 들었듯 주체는 자신의 원인인 언어 속에서 그저 ‘대리’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일부가 결여된 빗금쳐진 주체 ($) 가 된다. 이것이 곧 꿈 실수, 농담 등 우리 무의식의 모든 형성물들의 구조를 결정짓는 방식으로, 주체의 근원적 분열을 설명해 준다.[2] 아래의 도식은 이러한 고정점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초 아버지의 은유로 비롯된 원초적 억압 (S1) 이후 어떤 계기 (기표의 대체인 은유는 유사성의 원리로 작동 – 내 ‘마음’은 ‘호수’요 – 한다) 로 인해 2차 억압 (S6/S5), (S9/S8) 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이 때 억압되었던 기존 기표는 다시 유사성의 원리를 통해 복귀해 말실수를 일으키게 한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이전 글에서 예로 들었던 공포증까지 기표의 사슬 아래 포괄시켜볼 수 있다. (해당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싶다.)
(S5/s5)는 성적인 억압, (S6/s6)은 악어, (S12/s12)는 가죽이라고 봤을 때 악어를 통한 협박이 성적인 욕망을 억압시켰고, (S6/S5/s5) 특정 가죽 제품에 악어가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 과거의 외상적 사건이 공포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약간의 건방을 떨어 보자면) 결과물을 놓고 보면 우리의 의식의 흐름이라는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상당히 단순하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결과물을 얻으려면 수 년에서 수 십년에 이를지도 모를 관찰과 분석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참고로 정신분석은 이제 120여 년 남짓된 학문이다) 게다가 당대의 수많은 학자들조차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을 만큼 급진적이었다 보니 사실 이렇게 말을 꺼냈던 것조차도 송구스러워진다. 프로이트를 통해, 그리고 그를 더욱 빛나게 한 라캉을 통해 우리의 보이지 않는 무의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미지의 세계를 이토록 간단명료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류 문명사에 혁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쉼 없이 이런 책들을 정리하고 공유하고자 애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진리에 가까운 귀한 보물들이 우리의 삶에 의미있는 도약을 일으켜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글솜씨가 부족해 많은 분들께 공감을 얻진 못하고 있지만 이런 진심이 언젠가는 의미있는 결과로 돌아올 것이라고도 일단 믿는다. (ㅎㅎ;) 어쨌거나 무수히 다양한 경험(의 기표)들을 하나의 기표 아래 묶어내는 것, 결국 고정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장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주하게 될 주체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언제나 나를 의미하는 것은 어제가 아닌 오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처럼 의미있는 책들을 계속해서 소화해 나가는 것이 나에게 어떤 오늘을 선사해 줄지 늘 그렇듯 기대가 된다.
[1] p. 173
[2] p. 176
* 표지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