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누구보다 저자가 가장 궁금해 할 질문이겠지만, 이 책의 이론적 토대인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저자의 삶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한 사람으로서 특별히 다른 이들의 생각이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마침 서평단 활동 덕분에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들의 지원을 받아 좋은 피드백(리뷰)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필자 또한 오랫동안 미뤄왔던 글쓰기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전문서적의 진지함이 물씬 풍기는 이 책은 제목처럼 삐뚤어진 우리 내면의 성장 과정을 바로 세우는 것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최선의 방법을 알기 갈망하는 우리의 어려움은 결국 그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도록 이끌기 마련이다. 수 많은 책들이 그런 고민 끝에 태어났고 이 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저자의 경우 목회자이자 정신분석가로서 현장에서 만난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들의 회복에 관심을 갖고 일생을 바친 가운데 얻은 결실이라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 책은 정신분석학과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다. 물론 학술 서적이 아니기에 이론을 깊이있게 파고들어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학자들의 권위에 기대어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아마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독자라면 배경 지식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 보니 이해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언급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글 전반을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도 편안한 문체로 풀어내고 있어 크게 부담을 갖진 않아도 될 듯 싶다.
1. 성장을 방해하는 핵심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주어지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변화를 외면하도록 만든 배경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크게는 이전의 경험이 기쁨보다는 괴로움으로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적응의 시대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가속도마저 붙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수용의 강도는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한 분야에 통달하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과거의 전문성이란 앞으로 계속해서 새롭게 주어지는 것들을 자신의 관점에 맞춰 탐구하며 이를 소화해 나가는 융합적 태도를 가진 자에게로 넘어갈 것[1]이다. 흔히 오픈 마인드라고 하는 이 같은 태도가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 더욱 힘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가짐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저자는 대표적으로 부부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인 상대방을 탓하는 태도를 예로 든다. 잘못한 것에 대한 적절한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탓을 한다는 것은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림과 동시에 이미 내 안에 그를 원망하는 감정이 실려 있음을 의미한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의 태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괴로움을 그렇게라도 풀어야만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일본의 아베 정부가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엘리트 주의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자와 집단의 행위라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해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부부 관계는 파경을 맞거나 국가 사이의 관계는 단절될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인간관계 속에서 대상 탓을 하기 시작하면 문제해결이 어려워지고 커져가는 갈등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너 때문에 내가 결혼을 결정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또한 부모가 결혼을 하라고 해서 했다고 해도 거기엔 내 선택이 있으므로 문제들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인들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자기분석의 습관은 많은 갈등을 잠재운다. p. 85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 관계 속에서 누군가가 전적으로 잘못한 경우는 상대가 범죄자가 아닌 다음에야 명확히 가려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당면한 문제 속에 언제나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 즉 내가 기여한 원인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찾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앞서 밝혔듯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약점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실수에 민감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그것을 드러내거나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커리어가 단절되는 것을 각오해야 할 만큼 큰 두려움일 수 있다. 이럴 때 내가 져야만 할 그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쉽고도 편리한 방식은 역시나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그를 ‘탓’하는 것이다. 그나마 현 상황을 다각도로 분석해보고 난 이후에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당사자 모두에게 감정적 잔여를 남기지 않는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겠지만, 감정에 사로잡혀 그러한 과정을 생략할 경우 문제는 말 그대로 진흙탕 속으로 빠질 수 밖에 없게 된다.
2. 왜 탓을 하게 되는 걸까?
이처럼 스스로를 돌아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은채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려버려서는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나’의 성장에 있어서 그 해결책을 대상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성숙하지 못한, 의존적인 태도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어김없이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진다. 왜 그럴까? 1차적 원인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당장의 고통을 즉각적으로 벗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자기 책임을 인정할 경우 감당하게 될 괴로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2.1. 내적 대상에 대한 몰이해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 안에 이미 오래 전에 그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 ‘내적 대상’, 저자의 표현으로 ‘원가족’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정신 분석가 페어베언(W. R. D. Fairbairn)은 내적대상을 말한다. 이는 나쁜 대상으로 어린 시절 양육자의 나쁜 이미지를 통제하기 위해 내재화 한다는 것으로 어머니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나쁜 어머니를 차라리 내 안에 넣는 것이 낫겠다고 여기는 심리적 기제인 것이다. 투사는 바로 이런 것으로 나쁜 내적 대상을 내 안에 넣어놓고 그것을 현실 대상에게 투사하다 보면 그 대상은 영문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사람이 아니므로 생각 속에서 해석하고 분리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p. 86
따라서 그저 책임을 떠넘기고 끝낼 일이 아니라, 상대방의 어떤 면이 이미 형성된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스위치가 되었는지도 함께 살펴봐야만 한다. 타인의 행위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쟤 왜 저래?’ 라는 생각과 더불어 ‘내가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함께 아는 것이다. 이전에 리뷰했던 책 『인간 본성의 법칙』을 비판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타인을 관찰해 알아 적절히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 많은 정신분석 학자들의 이론을 통합했다고 주장했음에도 이러한 메시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에 – 실질적으로 이를 본성으로 치부하고 마는 – 밀려오는 실망감을 참기 어려웠다. 반응하는 나를 알아야 되는 것은 그것이 나의 관심의 방향, 정도, 한계를 아는 것이고 이를 토대로 의미있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의미있는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엉뚱한 진단과 해법으로 증상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고, 해당 문제는 해결됐는데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문제가 터져나올 수도 있다.
2.2. 희망의 부재
이는 성장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에 대한 깊이 있는 앎이 없이는 성장의 그 어떤 추동력도 얻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하는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에 익숙하고 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게 뭔지 모른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나를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그 감정에 충실하기도 전에 그것의 시비를 가리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정답만을 찾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살기 어렵다. 진심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면서도 이를 통한 기쁨을 누리지 못해 다른 중독 대상을 끊임없이 갈구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기대할 힘이 없는 말 그대로 ‘희망’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 내면의 본질적인 괴로움 자체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희망이 없는 삶을 말하고 있다. 절망이 문제가 아니라 희망 없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빛이 있다면 내일을 기약하고 인내하는 삶으로 나아가지만 실낱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땐 절망에 먹혀 버리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나약함이다. 요한 크리스토톰은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절망이다”라고 한다. 절망은 멸망으로 우리를 인도 한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인간은 구원자를 찾게 된다. p. 82
함께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고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때 절망의 어두움은 그 밝음 앞에서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게 된다. 빅터 프랭클이 발견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악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 또한 ‘의미있는 삶’을 향한 믿음이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것은 그 고통 이상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희망의 긍정적 에너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기독교가 끊임없이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그 어떤 어려움도 나를 흔들리게 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는 굳건한 신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천국을 향한 소망이 그것이다. 다만 천국을 향한 소망이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것보다는, 죽어서 갈 보상적 천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 같은 ‘심판론’이 갖는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배타적 혐오에 대해서는 알랭 바디우가 그의 책 『사도바울』을 통해 문제[2]를 제기한 바 있다.
3. 내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앞선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 저자는 나의 감정을 지배하는 원인과 책임을 돌아보는 자기 분석과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 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방법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앞서서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시비를 가리는 잘못된 습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시작은 이 같은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왜 이런건지 충분히 느끼고 감정이 이끄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이어서 이처럼 다방면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규정에 대한 항의 표시, 곧 의구심에서 출발해야 함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너무 익숙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에서부터 나를 알아가는 여정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내가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만 우리는 열정을 갖고 행동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궁극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은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서이다.
참 사랑은 대상의 자존감과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며 그를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 분석은 선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이 자신을 흥분시키는가를 봐야만 한다. 자신의 법칙, 환상, 의미들을 풀어내며 나아갈 때 자신의 변혁은 세상의 변혁으로 나아간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건강한 주체는 인간 성격을 규정하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조화로운 통합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통합에서 사랑은 회복되며 도덕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 세계를 들여다보는 긴 여정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p. 154
앞서 리뷰했던 책 『회복탄력성』에서의 중요한 연구자료[3]에서도 밝혔듯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를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아이의 선택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존재(반드시 부모가 아니더라도)를 통해서였다. 저자가 상담을 통해 실현하는 사랑이란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주체성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선택에 대해 조금씩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에서 나만의 길은 비로소 열릴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감추어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상대를 교묘히 조종하려고 하는 오늘날의 수 많은 앞선 세대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사랑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깊이있게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나의 내면의 역사를 인식하도록 이끄는 자기분석, 그리고 이를 통해 의도되지 않은 순수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아는 것에 진지한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삶의 전반을 개략적으로 아우른 이 책을 그런 점에서 담담한 마음으로 추천한다.
[1] <중앙일보>, 전문가 시대 끝났다. 융합적 이해력이 더 중요한 능력, 2018.04.06
[2] 알랭 바디우, 『사도바울』, 새물결, 2008, p.p. 181 – 184
전통적으로 사건을 객관화해온 교회의 교의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이 믿지 않는 자들을 벌줌으로써 믿는 자들을 정당화해줄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정의는… 일종의 분배가 된다.
천국보다는 지옥이 항상 예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더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왔는데, 왜냐하면 희망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서 주체가 요구하는 것은 악한 자는 처벌받으리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때 희망에 의한 믿음과 사랑의 정당화는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 된다. 희망은 타인들에 대한 증오, 원한에 의해 관통된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주체적 차원은 극복된 시련이지, 우리가 그것의 이름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어떤 것이 아니다. 희망은 ‘시련을 이겨내는 충실성’이며 이 시련을 관통하는 사랑의 끈기이지, 결코 보상이나 벌에 대한 비전이 아니다. 희망은 승리한 충실성의 주체성, 이 충실성에 대한 충실성이지 일어날 결과에 대한 표상이 아니다.
[3] 김주환, 『회복탄력성』, 위즈덤하우스, 2019, p. 58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관계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사람이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 말대로, 사람은 결국 사랑을 먹고 산다는 것이 카우아이 섬 연구의 결론이다. 아이는 사랑 없이 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을 먹고 자라야 아이는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아존중심을 길러가며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복탄력성의 근본임을 카우아이 섬 연구는 알려준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Illustration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