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남자로 가득한 집안에서 사촌 동생들과 즐겨했던 건 ‘싸움 놀이’였다. 스테이지가 넘어갈수록 악당인 필자가 더 강한 상대가 되어 나타나지만, 동생들이 한 팀을 이뤄 결국 최종 보스까지 해치우고 승리하는 컨셉이었다. 이렇게 늘상 지는 캐릭터이긴 했지만 놀이 과정 자체가 주는 만족감 (싸움 초반에 영웅들을 궁지에 몰아가는 즐거움) 과 ‘져주는 것’이라는 진실이 균형을 이뤄 모두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스킨십이었다.
이런 놀이의 배경에는 신체적으로 강한 남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무술 고수가 되어 적을 무찌르는 장면은 평소에는 상상을 통해서, 친척 동생들과 만났을 때는 놀이를 통해서 상연되었다. 아마 남자라면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법한 일일텐데, 이런 환상이 등장하게 된 것에는 스스로 ‘너무 약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싸움을 잘하지 못한다는 결여감이 잘하고 싶다는 욕망과 환상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게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환상을 마주할 때 그의 결여를 엿볼 수 있다. 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 때문에 대상을 욕망하고 있다고 말이다. 부자가 되는 환상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렸을 때 많이 가난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결여로 인한 괴로움을 완화시키기 위해 환상을 창조했다는 이런 표준적 해석에 대해 지젝은 일곱 가지 이유 (필자는 이를 다시 세 가지로 줄여 보았다) 를 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다. 환상은 그것이 갖고 있는 여러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그 의미를 결코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 라캉의 환상은 무엇일까?
라캉은 환상을 $ ◇ a 라고 정의했다. 언어적 표현의 한계 (욕구를 요구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음) 로 인해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된 주체($)와 욕망의 원인(a)간의 관계(◇) 속에서 탄생함을 설명했던 것이다. 여기서 ‘a’는 보통 ‘대상 a’라고 읽지만, 끊임없이 대상을 옮겨 다니는 (환유적) 욕망의 특성, 즉 사실상 ‘대상이 없다’는 점에서 ‘욕망을 일으키는 미지의 원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온전히 이룰 수 없음으로 인해 등장하는 욕망은 자신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환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런 환상을 간단히 원초적 상실에 대한 서사 (충동의 포기 과정) 라고 표현한다. 앞서 든 예처럼 내가 만약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면 환상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어떤 이유에서인지 공격적인 충동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욕망이 생겼던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거세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거세를 실현하는 아버지의 중요한 역할은 충동 만족 (주이상스) 의 금지와 어머니의 단념에 있다. (* 참고 글 :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가족 사이의 관계에서 이 과정이 실현 되어야만, 아이는 충동 포기의 대가로 얻은 욕망과 환상이라는 무기를 갖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주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대표적인 환상가(?)라고 할 수 있는 일론 머스크를 보면, 현재 그가 경영하는 회사들은 모두 ‘화성 식민지 건설’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오랜 기간 꿈꿔왔던 일이지만 선뜻 시도하지는 못했던 일을 그는 어쩌다 그렇게 강하게 열망하게 됐을까?
2. 환상의 7가지 특징들
한편, 앞서 설명한 환상의 내용을 보면 결국 욕망에 대한 표준적 해석에 대해 라캉과 지젝 역시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어떤 점 때문에 이런 단편적인 해석을 경계해야 된다고 말하는 걸까? 환상이 상실을 전제한다는 것은 실재의 공포를 은폐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상실의 고통, 두려움, 공포와의 대면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환상이 공포심을 은폐하고 있다고 단순화 (환원) 시킬 수도 없다. 분명 환상이 공포를 은폐하고 있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은폐하려는 것 자체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2.1. 환상의 이중적 성격
2.1.1. 선험적(보편적)인 동시에 개별적
선험적이라는 것은 경험 이전에 무언가 이미 주어져 있음을,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욕망의 방식을 알려주는 환상의 보편적 구조를 의미한다 (환상을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은 없다). 물론 환상의 형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개별적일 수 밖에 없다. 지젝은 이를 라캉의 유명한 명제인 “성관계는 없다”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성적 흥분이라는 것은 특정 상황, 분위기, 대상의 특정 신체 부위 등(a)을 통해 유발되는 것으로 온전한 인간 자체를 통한 성적 관계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망에 대상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성적 환타지에 있어서 사람마다 무한대의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는 (전적으로 개별적) 뜻이기도 하므로 개개인의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보장하는 마법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성원 각자는 그저 서로의 환상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환상은 욕망을 통해 자연스럽게 등장하기에 선험적 (보편적) 이며, 삶의 역사 속에서 뿌리내리기 때문에 철저히 개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2.1.2. 긍정과 부정의 상호의존성
인간의 모든 선택에는 긍정적 차원과 부정적 차원이 존재한다. 환상도 마찬가지로 부정적 차원(환상2)은 긍정적 차원(환상1)의 실패를 보완하며 상호의존적으로 작동한다. 나치를 예로 들자면 우월한 독일인이라는 환상1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협하는 존재 (유대인) 를 제거해야 한다는 환상2가 반드시 필요했다 (내부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외부에 적을 만들고, 전쟁을 벌이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젝이 지적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장애물 (필연적인 생산 과잉으로 인한 주기적 침체) 의 제거를 시도하지만, 과잉과 제거라는 두 축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키는 환상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비판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공산주의는 하나의 불가능한 환상이라고 주장할 때 그들의 주장은 다소 옳았다. 그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자본의 틀 밖에서 해방된 이러한 순수 생산력 사회개념인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환상, 즉 가장 순수하게 위반을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본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가 보여주듯이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영원히 자기를 고양시키는 생산력 사회의 실제적인 물질적 생활을 유일하게 가능케 하는 틀이었던 ‘장애물들’과 대립들을 제거하지만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생산력에 대한 공격을 유지시키는 엄밀히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이었다는 점이다. 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pp. 34 – 35.
2.1.3. 이중성을 억압하는 서사
이중성은 기본적으로 대립과 갈등을 의미한다. 욕망을 탄생시키는 상실이라는 전제 또한 충동 만족 (주이상스) 과 금지 (거세) 라고 하는 이중성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탄생하는 환상은 무엇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갈등이라는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는 것, 즉 현재의 적대적인 상황을 무마시키는 덮개로 작용하는 것이다. 상실은 당사자가 그 상황을 상실로 받아들였을 때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즉 주어진 상황을 상실이라고 정의했을 때 비로소 슬픔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가 전통에 의해 미리 결정된 폐쇄적이고 순환적인 반복 운동에 불과하다고 정의하는 순간 당시의 사람들은 불쌍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이처럼 연속된 과정을 단절시키는 환상의 서사적 기능은 그것으로 인해 무언가 남은 것 (a) 을 만들게 된다.
2.1.4. 대상과의 상호주체성
우리가 갖고 있는 환상은 얼마나 순수할까? 다시 말해 100% 주체의 의도만으로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할까? 여기에 대한 라캉의 대답은 ‘No’이다. 환상을 통해 드러나는 욕망은 사실상 주체가 아닌 대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딸기를 먹고자 하는 환상을 갖고 있다는 건 단순히 딸기를 원했으나 얻지 못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아이가 만족하며 먹는 모습을 부모가 매우 만족해 한다는 것, 즉 딸기를 먹는 환상은 딸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아이의 시도인 것이다. 이처럼 아이는 부모를 만족시킴으로써 스스로가 부모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에 대해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 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내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더 근본적으로 “타자들이 내게 원하는 것, 나를 통해 보는 것, 다시 말해 나는 타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상호주체성에 대한 라캉의 이론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라캉은 헤겔-코제브의 ‘인정 투쟁’을 배경 삼아 ‘대상’을 인정, 또는 사랑을 받도록 해주는 매개물로만 간주한다. 하지만 중기의 상징적 구조로서의 대타자를 지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이전의 상호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환상 속 ‘대상’은 더 이상 내 욕망과 대타자 욕망 사이의 매개자 (상호 주체적) 가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 a’ 라는 개념은 ‘내 안의 나 자신보다 더 많은 무엇’이라는 정의를 통해, 분열된 주체($)와 상실된 대상 (이미 주체인) 을 매개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2.2. 무한대의 가능성
2.2.1. 무한한 주체의 자리
한편 욕망이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환상이 대타자의 욕망을 상연한다는 명제는 환상에 등장한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무한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심지어 환상 속에서 등장한 ‘나’ 조차도 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서 ‘딸기 먹는 환상을 가진 아이’의 예처럼 자아-이상, 즉 대타자의 응시에의 동일시로 여기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환상 속에 등장하는 모든 구성원들은 프로이트 이전처럼 1:1로 대칭시키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호랑이는 무엇을 상징한다라는 식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해야 한다. 욕망은 자신을 모든 대상에게 동일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2. 불가능한 응시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환상은 대개 모호하기 마련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사례에 대입해 보는 것, 또는 사건 자체를 단순화시켜 보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들 모두는 명료한 이해를 위해 많은 조건들을 제거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관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지젝은 테레사 수녀가 헌신했던 콜카타 지역을 묘사하는 미디어 보도들에서 이런 응시를 발견한다. 해당 지역을 마치 지상의 둘도 없는 지옥으로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 않고 온 정성을 바치는 성녀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사람들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려는 시선 말이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불가능한 응시를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결혼 전 상대에게 갖는 환상 (기대) 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다. 마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케케묵은 동화의 결론처럼 막연하게 갖고 있던 결혼에 대한 환상은 현실과의 만남을 통해 산산조각 나게 된다. 여기에서 두 사람이 해야할 것은 함께 새로운 적응 방법을 찾아나서는 길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응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대상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3. 거세의 상연
환상이 상실을 전제한다는 것, 즉 거세를 상연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방식이다. 하지만 지젝은 거세의 상연이란 법을 통해 금지된 욕망을 환각적 방식으로 실현 (법의 위반)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욕망을 금지시키는 절단 자체를 상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얼핏 보기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인데, 그가 다른 책에서 들었던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가장 좋았던) 예를 들어보면 좋을 듯 싶다.
우리가 감옥에 갔다고 가정했을 때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감옥을 나갔을 때의 희망 (환각의 상연) 에 기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거세를 외면하는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거세를 상연한다는 것은 주어진 현실의 갈등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식으로 죽어서 갈 천국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온전히 지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이처럼 현실의 실재적 고통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환상에 빠지는 것을 포기 (환상 가로지르기) 하고 현실의 제약을 모두 수용하면, 역설적으로 진정한 희망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현재에 충실하라고 하는 조언과 정확히 부합하는 이러한 표현은, 실재를 제거하려고 하는 오늘날의 많은 시도들에 대해 비판하는 그의 다양한 주장들을 통해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 참고 글 : 실재라는 이름의 십자가)
3. 환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살펴본 바와 같이 환상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내면 세계처럼 복잡한 특성을 고스란히 닮아 있다. 사실상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전부를 환상이 상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이고, 긍정과 부정을 아우르며, 한편으로는 이런 이중성을 억압하기도 한다. 환상의 기원은 대타자에게 있지만, 등장 대상은 누구나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누구도 될 수 없다. 이런 무한한 가능성의 결과물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여기에 대한 지젝의 입장은 단호하다. 결코 섣불리 상대의 환상을 해석 (지나친 단순화) 하려 들지 말라는 것, 그리고 상대가 갖고 있는 위반 환상을 직접 실현한다거나,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다. 설사 어떤 여성이 강간 당하는 환상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 실상 그녀는 그런 환상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그런 환상을 갖지 못한 여성에게 행하는 것보다 더욱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다. 환상을 통해 유지시켜 온 그녀의 주체성의 기반 (어떻게 그런 환상을 갖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상의 이러한 특징을 염두한다면, 우리는 상대를 보다 열린 자세로 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환상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여로 인한 환상적 만족의 창조라는 표준적 해석이 무의미하다는 뜻도 될 수 없다. 환상의 무한한 변주를 꿰뚫는 본질적인 요인이니까. 결국 여기에서도 표준적 해석을 ‘보편적’이라고 본다면, 개인의 환상이라고 하는 ‘개별적’ 요인을 충분히 살펴보기 전까지 우리는 모든 판단을 충분히 유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주체를 향한 정신분석의 여정이자,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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