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를 한다면 라캉처럼, 매듭의 여운,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루크 서스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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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하는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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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라캉이 인간의 내면세계 자체 (구조) 라고 표현한 보로메오 매듭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참고 글 : 라캉이 말하는 글쓰기의 가치, 보로메오 매듭) 무언가 이해 불가능한 내면의 계기에 대한 생각, 심지어 그 불가능성마저도 도식화하려고 했던 그의 열망은 마침내 매듭과의 극적인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일생을 인간의 정신 이해에 바친 70대의 노학자는, 프로이트주의의 상징적 계승이라는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진실을 향한 발걸음을 옮겨갔던 것이다.

하지만 매듭의 중핵 (대상 a) 이 말해주듯 진실은 언제나 외상과도 같은 만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궁극적인 원인 앞에서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고백이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 일생을 바친 끝에 얻은 결론이라면 어떨까? 물론 라캉의 놀라운 점은 그 미지의 불가능성 마저도 포섭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적으로나마 창조해 냈다는데 있긴 하지만. 게다가 진실과의 외상적인 만남은 단지 무능함에 대한 고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마저도 부정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은 앞서 언급했던 매듭의 특성 (① 라캉 이론의 종합 아님, ② 은유 아님, ③ 실재 지탱하는 병증적 글쓰기임) 의 연장이면서도 특별히 문제적이었던 부분과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 매듭이 야기한 문제

1.1. 이해 불가능한 것들의 종합

수학에서의 매듭이론은 위상학의 하위 분야로 양쪽 끝이 연결된 (폐쇄된) 노끈의 꼬임 (매듭) 을 연구하는 실용 학문이라고 한다. 이런 특성 탓에 세 개의 끈이 꼬여있지 않고 서로 얽혀 있기만 한 보로메오 매듭을 정확하게 ‘고리’라고 표현하는게 적절하다는 지적[1]도 있다. 이런 이론적 엄밀함과는 별개로 보로메오 매듭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어떤 요소들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 제시됐다. 하지만 아직 이중진자의 움직임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한대의 변수의 조합인 인간의 정신 세계를, 게다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정의한 실재계까지 포함시키면서 더더욱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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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중진자 운동 (출처 : 클리앙[2])

어찌보면 정신분석을 부단히 과학의 자리에 위치시키고자 했던 그의 목표 (수학적 공식화) 와는 정반대되는 결론으로 학문적 생을 마감하게 된 셈이다. 물론 그 영원한 설명 불가능함, 무한대의 결여야말로 인간의 호기심을 끝없이 자극하는 욕망의 근원이 될테지만, 보다 정교한 이해로 나아가기 원했던 이들에게는 허탈함만 남길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라캉은 1975년 2월 18일 22번째 세미나를 통해 세 개의 체계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며 매듭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했다. 상상계를 구조를 표현할 수 있는 ‘일관성’으로, 실재계는 존재를 벗어나 있는 ‘탈존’으로, 상징계는 속이 텅 비어있는 ‘구멍’으로 묘사한 것이다. 사실 존재가 아닌 것을 상상한다는 것도 억지스럽긴 하지만, 상상과 실재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속이 비어있는 상징이라는 정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지어 라캉은 이어지는 세미나를 통해 이런 설명까지 덧붙인다.

“상징적인 것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구멍 주위를 회전하는데, 이 구멍 없이 매듭은 보로메오적인 매듭이 될 수 없다. 즉 상징적인 것의 구멍은 침범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보로메오 매듭의 의미이다.” – J. Lacan, “Le Séminaire XXII, R. S. I.,” Ornicar?,1975〜76, no. 5, p. 21 (1975년 3월 11 일 세미나). 필자의 번역.
p. 189 에서 재인용

상징적인 것은 결코 구멍을 침범할 수 없고, 그저 겉돌 수만 있다는 것이다. 상징계의 이런 특성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 유형이 주체화에 모두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 때문에 계속 고민이 됐는데, 차라리 라캉 이론의 중심 기둥인 언어학을 차용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상의 부재를 나타내는 언어 (부재로 이루어진 현존인 말 [3]) 야말로 상징의 텅 빈 특성을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기표는 기표일 뿐 존재를 담아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이렇듯 실재 뿐 아니라 상상과 상징마저도 존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에, 우리는 매듭이라는 공식을 마주하면서도 철저한 오인 (잘못된 인식) 의 영역에서 허우적 댈 수 밖에 없게 된다.

1.2. 뿌리부터 흔들린 상징적 이론 체계

이전 글에서 매듭을 통해 ‘증상’이 ‘상징’의 지위로 격상되었음을 설명한 바 있다. 주체를 유지시켜 주는 것 (4항) 은 더 이상 상징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매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60년대) 상징적 질서가 상상적 자아와 모호한 실재 사이를 중재한다고 보았다. 상징계의 우위가 명백했던 셈이다. 하지만 매듭의 등장은, 아니, 정확히 말해 매듭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그의 고민은 늘 나타나 구축된 질서를 뒤흔드는 무언가 (대상 a) 에 대한 부분이었다.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것에 답답함과 묘한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환자의 증상과 증상 속에 내재된 향락은 사실상 세 심역 사이에 어떤 우열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이처럼 라캉이 매듭을 연구한 마지막 10년 전까지, 주체를 붙잡아주는 것은 명백히 상징계의 역할이었다고 보았다. 비록 대상 a가 60년대에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어머니라는 대타자를 품은 상징으로서의 아버지는 여전히 보호자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자는 당시 라캉의 환상 공식 $◇a 이 이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이 수학소를 앙드레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주체가 환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와 a 사이를 매개하는 마름모꼴(◇,poinçon)로서의 아버지의-이름 때문이다.” 즉 주체와 외상적인 대상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함으로써 아버지의-이름은 주이상스의 조직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주체는 실재를 피해 망명한 자 또는 그로부터 보호되는 자와 동일(시)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p. 195

라캉에게 있어 실재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어머니와의 융합된 관계 (소외) 와의 단절 (분리) 을 이끄는 아버지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다.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을 경우 (어머니를 향한 욕망이 거세되지 않을 경우) 극단적으로 아이는 정신병 (아버지 이름의 배척, 폐제) 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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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과정 (출처 :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1』 참고로 직접 작성)

슬프지만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이런 (건강한) 좌절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욕망의 주체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전까지의 교훈이었다. 하지만 매듭은 심지어 정신병이라고 하는 증상에 대해서도 더 이상 주체화의 실패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정신 세계를 구축해 낸 그야말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 (성공한 주체화) 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상징과 증상이 서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는 것은 환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더 없이 희망적인 일이다. 하지만 정신분석의 이론과 임상 측면에서는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주체의 중심부에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닌 개인마다 특수한 주이상스인 대상 a 만 남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 어떤 항목도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없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은유마저도 망상적 은유와 차이가 없게 되어버린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라캉의 여정도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병증적 글쓰기라는 접근 전략만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2. 매듭이 남긴 의미

저자가 누차 강조했던 것처럼, 보로메오 매듭은 라캉 이론의 종합 (메타언어) 이 결코 아니다. 그의 이론 체계의 핵심이 ‘상징’과 ‘증상’으로 분리된 것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종합의 실패’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오락가락하는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면 과연 그 이론을 신뢰할 수 있을까?

갈림길 1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출처 : pexels[4])

평소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요약하자면 이론과 현실의 차이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주변에 어떤 특이한 증상을 보이는 아이가 있다면 필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부모와의 상호 작용에서부터 원인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아이 증상의 1차 원인이 보호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인데,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이 그런 예를 아주 잘 보여준다. 아내도 그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개의 해석에 공감해 주는 편이지만, 때때로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들의 전혀 다른 반응을 예로 들며 반론을 제기하곤 한다. 말 그대로 이론 (상징) 은 이론일 뿐, 언제나 이를 벗어나는 현실 (실재) 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것) 이다. 사실 필자 스스로의 가설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으면서도, 아내의 이런 주장에 대한 대답도 언제나 ‘그럴 수 있다’ 였다. 그러면서 늘 덧붙이는 표현이 있었는데, 아마 매듭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현실은 언제나 이론 너머에 있지만 (상징은 실존의 구멍을 결코 침범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과학적 관찰에 근거한 이론이 무화되는 것도 아니다. 패턴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이론은 문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진단이 잘못됐을 가능성도 언제나 배제할 수는 없지만, 파레토 법칙 (20%의 원인이 80%의 결과를 일으키는 현상) 에서처럼 보다 가능성이 높은 문제를 심도있게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만약 관련 지식이 없을 경우 적절한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차가 무한대로 벌어질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시의적절한 판단 근거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중요한 이론도 개인적 경험과 맞물려 확장되지 못한다면 그저 수 많은 암기 과목의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분명 존재의 무한함에 둘러싸여 있으나, ‘우리가 접촉할 때에만’ 주체적 운동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글 : 우리는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매듭에서의 대상 a 란 어쩌면 이 같은 보편성과 개별성이 마주하는 특이점에 대한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 속에서 무엇이 등장할지는 결코 알 수 없을 뿐.

한편으로 이미 철저한 오인 속에 갇혀 있는 우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온전한 이해란 언제까지고 불가능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라캉은 그의 마지막 도식을 통해 이러한 한계에 대한 도전을 결코 멈추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당대에 의문시 할 수 있는 용기, 그렇게 라캉 스스로가 정신세계의 이해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1]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150
[2] 클리앙, 이중진자 운동
[3]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 1』, p. 173
[4] pexels

* 표지 이미지 출처 : Freud Museum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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