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우는 것 뿐이다. 이를 본 엄마는 곧바로 달려와 젖을 먹이거나 안아서 달래준다. 그러면 아이는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엄마의 반응이 만족스러웠음을 보여준다. 아이를 키우는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위대함? 아이를 잘 받아주는 것의 중요성? 잘 달랠 수 있는 기술? 아마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의 시조인 프로이트와 그의 이론을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라캉에게 있어서도 아이의 첫 사회적 경험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사례야말로 그들 이론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라캉의 욕망 개념이 아이의 최초 만족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통해서만 가치를 가질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1. 프로이트의 욕망
아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아이는 자신에게 찾아온 충동의 자극으로 인해 긴장 상태에 빠지게 되고, 야기되는 불쾌함을 견디지 못해 소리내어 울면서 버둥거린다. 여기에서 첫 표현은 아이에게 어떠한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욕구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어머니를 통해 긴장 상태가 이완 (충동 긴장의 소멸) 되는 최초의 만족을 통해 어떤 기억 – 자신을 만족시킨 대상의 이미지와 지각이 직접 결합한 표상의 형성 – 이 자리잡게 된다. 표상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충동이 다시 발생할 때의 욕구는 더 이상 순수한 것이 아닌 이전의 만족 기억 (욕망의 성취) 과 결합된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욕망은 무언가가 지각되는 상태에서 만족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리비도 점령), 즉 심리적으로 만족의 상황을 다시 등장시키는 역동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만족을 제공한 대상을 찾아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욕망 자체는 현실에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아, 충족할 수 없는 것으로 머무르게 된다.
욕망은 최초의 만족 경험에서 자신의 전형을 발견하며, 더 나아가 주체로 하여금 그 경험을 넘어서 자신에게 만족을 제공하는 대상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끈다.
p. 229
2. 라캉의 욕망
2.1. 충동과 욕구의 차이
라캉은 프로이트의 충동과욕망의 관계에 주목하며 그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작용하는 힘인 충동이 승화 과정을 통해 대상에 도달함으로써 만족된다고 봤지만, 충동의 원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억제’했다는 점에서 그것이 진정한 만족인가 라는 문제가 있었다. 라캉은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와 다른 길을 간다. 그에게 있어 충동은 욕망의 일주운동이다. 즉, 내적 운동을 일으킨 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일종의 왕복 운동인 셈이다. 따라서 애초에 목표가 정해져 있어 달성되면 만족을 느끼는 욕구와는 달리 충동은 목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충동에 대한 이런 개념은 욕망과 불가분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데, 충동의 대상은 영원히 상실된 욕망의 대상 (대상 a) 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음으로써 식욕을 채울 수 있다면, 충동은 그저 입의 쾌락 (씹는 즐거움) 이 될 수 있다. 또한 더욱 극적으로 환자들이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변화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증상에서도 알 수 없는 만족을 제공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 증상을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그들의 욕망은 과연 무엇일까?
2.2. 욕망을 탄생시키는 대타자의 등장
한편 프로이트 이후의 욕망 개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라캉이 최초의 욕망이 대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을 밝혀낸 것에 있었다. 대타자의 원초적 억압을 통해 생성되는 욕망에 대한 설명은 예전 글 –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살펴보기 – 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프로이트의 경우에도 아이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타자로서의 어머니가 등장하지만, 그의 관심이 집중된 곳은 주로 아이의 내면이었다. 반면에 라캉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다. 충동으로 인한 아이의 욕구 표현을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확장은 라캉 특유의 첨예함 덕분에 놀라운 통찰로 나타나게 된다.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없는 아이에게 타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다만 아무 타자가 아니라 아이의 육체적 표현에 관심을 갖는 타자, 즉 아이의 표현이 의미가 있음을 승인해주는 타자만이 아이를 만족시키며 생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이처럼 아이의 표현에 대한 타자의 개입은,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가정에 대한 응답, 달리 말해 의사소통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대타자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아이의 요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타자에게 특권을 부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중요한 대타자의 정확한 의미가 책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등장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긴 했다). 일반적으로 어머니가 대타자와 동일시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으로, 아이는 여러 번의 만족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이미지와 일치하는 대상 (대타자) 만이 자신에게 만족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아이의 만족은 전적으로 대타자 자신의 해석과 욕망에 따라 반응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는 아이가 대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이미 그의 욕망에 종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의 최초 만족 경험은 대타자의 반응을 통해 연장되면서 욕구 만족을 넘어 넘치는 즐거움, 즉 잉여 향유가 된다. 이렇게 충만한 이자 관계를 통해 아이는 자신만이 대타자를 소유하길 원하며, 대타자의 유일한 욕망의 대상 (대타자의 욕망의 욕망, 팔루스) 이 되길 희망하는 사랑의 요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곧이어 만나게 되는 결여, 즉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원초적 만족은 원초적으로 억압 (무의식, 주체의 탄생)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 하에 영원히 상실된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 되기’는 아이로 하여금 진정한 분열, 즉 욕망을 찾아 나서는 주체로서 모습을 드러내도록 이끌게 된다. 상실된 대상의 자리에는 다양한 대체 대상 (환유적 대상) 들이 선택되어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의 여정과 동행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향유라는 잉여 [덤, l’en plus] 는 좁은 의미의 욕구 만족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욕구] 만족 경험이 종료될 때만 어린아이는 대타자에게 발하는 요구라는 매개를 통해 욕망할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가게 된다.
p. 235
2.3. 욕구 – 요구 = 욕망
이처럼 대타자를 통한 욕망의 탄생은 아래와 같이 간단히 정리해볼 수 있을 듯 싶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주어졌던 최초의 만족 (욕구의 충족) 은 아이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겨져, 이를 다시 경험하기 위한 요구 (욕망의 표현) 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무언가 상실된 것이 존재한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잉여분, 즉 욕망의 대상 (대상 a) 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 때문에 아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을 요구하지만, 요구가 지속될수록 욕망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욕망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표현(요구), 즉 언어의 한계는 동시에 우리의 욕망을 평생토록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그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3. 욕망 공식에서 충동이 배제된 이유
한편, 글을 정리하면서 가장 고민이 됐던 부분은 욕구와 충동의 상관관계였다. 프로이트의 경우, 충동이 자극되는 순간 기억의 재활성화로 욕망이 출현함을 이야기 했다. 반면 라캉의 경우에는 이러한 충동이 결여와 결합될 때만 욕망이 출현할 수 있음을 밝힌다.하지만 욕망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항상 요구와 욕구 사이의 욕망’이라고 하며 (2.3의 제목이기도 한) 충동을 배제시키는 표현을 한다. 충동과 욕구가 거의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표현 (단어의 다양한 사용) 이 이해가 됐을텐데, 생물학적 목표가 존재하는 욕구와 목표가 부재한 충동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충동을 제외시킨 것에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3.1. 욕망에 있어서 충동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 부분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른 책을 참조할 필요가 있었는데, 딜런 에번스가 이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욕동은 단순히 욕망에 대한 다른 이름이 아니다. 욕동은 욕망이 실현되는 부분적인 측면들이다. 욕망은 하나이고 나누어지지 않는 반면에 욕동은 욕망의 부분적인 발현이다.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278
※ 위 책의 ‘욕동’은 프랑스어로 pulsion 을 의미하며, 동일한 원어가 본 책에서는 ‘충동’으로 번역 되었다.
그에따르면 충동(욕동)은 욕망에 포괄되는 개념이다. 즉, 욕망을 이야기했다면 그 안에 사실상 다양한 충동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욕동으로 표출되지 않는 욕망도 있다고 한다). 조엘 도르가 ‘충동 대상이 욕망 대상 자체의 환유적 대상일 뿐’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욕망을 부분적으로 체현한 충동은 다양한 위치 (구강, 항문, 시각, 청각 등) 에서 주체의 욕망을 활성화 시킨다.
3.2. 충동과 욕구의 차이에 대한 보충 설명
더불어 충동과 욕구의 차이에 대해서도목표 대상의 유무에 더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본능에 속하는 욕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상대적으로 고정된 관계를 갖고 있는 반면, 충동의 경우는 주체의 삶의 역사와 함께 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구분을 따라 충동과 욕구를 구분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은 두 개념이 이처럼 큰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최초의 만족이 재현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라캉이 프로이트를 따라 선택한 것은 지각과 기억의 결합, 즉 표상의 형성이었다. 매개로써의 표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만족과 표상이 존재한 상태에서의 만족은 분명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에 더해 예측 가능성이라는 표현을 덧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만족스러운 기억으로 인해 도래할 반응이 예측 가능해지면서 우리는 점차 ‘익숙함’이라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한편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식상함을 더하는 이러한 기억의 역설 덕분에 우리는 계속해서 욕망의 대상을 옮겨 가야만 한다. 어찌보면 영원한 욕망의 형벌을 받은 탄탈로스 (과일에 손을 뻗으면 가지 위로 올라가고, 강물을 마시려고 하면 물이 바닥에서 사라져 버리는) 같아 보이지만,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사건들을 통해 오히려 나의 결여가 더 큰 기쁨으로 채워지는 삶을 기대하고 만끽할 수 있다면 어떨까? 물론 ‘아무에게나 함부로’ 결여의 축복을 언급해서는 안되겠지만, 결여가 삶의 본질임을 인정함으로써만 진정으로 욕망하는 주체로 탄생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어쩌면 좀 더 흥미진진한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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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의식을 구조화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2. 팔루스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3. 아버지의 은유로 살펴본 가부장제의 의미
4.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5. 라캉적 분열의 의미와 공포증 사례 분석
6. 언어적 주체와 고정점 (누빔점)
7. 말하기의 중요성, 그리고 분석가의 개입
8. 주체와 자아의 차이, L도식
9. 주체화 과정을 설명하는 변증법과 반변증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