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평소심리학이나 특히 정신분석적 치료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무려 50여 년에 걸친 임상 경험의 정수를 너무나도 쉽고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랑스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난해한 글과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한 정신분석학계에서 간결한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소통해 왔다고 한다. 아마 정신과의사 최초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1]이라고 한다.)
평소 저자의 이름만 알고 있다가 어떤 분의 소개글에 호기심이 생겨 구입하게 됐는데, 사실 한동안 장바구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책 제목이 좀 전문적이지 않게 느껴져 (‘힐링파워’라고 하니 뭔가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주문을 외워야만 할 것 같은) 구입을 주저했던건데, 읽고 나서 한국어판 제목을 지으신 분이 원망스러웠다 (참고로 원제를 한글로 옮기면 『예, 정신분석은 치유됩니다!』 이다).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따뜻함 그 자체다. 아마 역자가 존댓말로 번역한 것도 영향이 있지 않나 싶은데,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듯 시종일관 친절한 임상가의 세심함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내용은 자신의 치유 방법 소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비평적이거나 분석적인 내용없이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다른 라캉 관련 글들처럼 머리를 쥐어 싸매고 읽지 않아 좋았단 뜻이다.) 그러면 이 현대적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의 고통을 어떻게 회복시켜 왔을까? 이번 글에서는 그가 환자들을 치료해 온 과정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1. 정신분석적 청취
정신분석을 비롯한 모든 상담은 기본적으로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의 듣기는 일반적인 듣기와는 다르다. 저자가 전반부에 걸쳐 소개하는 정신분석적 듣기, 즉 청취는 자신의 무의식으로 내담자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환자가 겪었을 아픔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어야만 의미있는 치료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감과 같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핵심적인 차이는 상담자가 도구적 무의식을 사용했는지 여부에서 갈린다고 볼 수 있겠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썼어요. “분석가는 자기의 무의식으로 환자의 무의식을 포착한다.” 저는 이 문장을 조금 수정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분석가는 자기의 무의식을 동원하여 환자의 무의식적 환상을 포착해 낸다! 정리하면, 분석가는 내담자 내부의 무의식에 도달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온전한 청취가 일어났을 때 분석가 자신의 내면에 환상 형태로 드러난 환자의 무의식에 도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p. 50
자기의 무의식을 동원하는 것이 바로 ‘도구적 무의식’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 무의식의 목표는 ‘환자의 무의식적 환상을 포착’하는 것이다. 환상이 목표인 이유는 오랜 상담 회기를 거치면서 환자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에 관심을 집중 (청취) 한 끝에 도달하게 되는 환자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환자만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했을 때에만 떠오르게 되는 이런 환상은 환자에게 조심스럽게 전달 (해석) 될 때 의미있는 치료 효과로 나타나게 된다.
치료자로서 제가 가진 소신은 이런 것입니다: 분석가가 자기의 도구적 무의식을 사용해 환자를 청취한 다음 폐부를 찌르는 적확한 말인 해석을 건넬 때, 환자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부정적인 지각을 포기하면서 내담자 상태가 좋아진다!
p. 18
2. 정신분석적 청취의 5단계
이제 분석가가 환자를 치유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저자가 설명한 청취의 핵심 단계들은 ① 관찰 ② 이해 ③ 몰입 ④ 동일시 ⑤ 해석이다. 물론 이 단계들은 임상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것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거나 생략되는 경우도, 때로는 동시에 벌어지기도 한다. 특히 환자가 의식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첫 회기 때 곧바로 교정적 해석을 건네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2.1. 관찰
먼저 관찰은 말 그대로 환자가 말하는 것 (언어적) 과 행동, 태도 (비언어적) 등 모든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환자를 둘러싼 모든 것을 그의 무의식적 표현으로 보고 탐구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떨 때는 환자의 반려견을 데려오기도 하고, 또는 사진 앨범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 등은 모두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환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욕망과,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2.2. 이해
이해는 환자가 드러내는 다양한 표현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드러난 것에 내재된 의미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이 때 분석가는 환자를 괴롭히는 근원적인 갈등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환자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무의식적 도착 환상들이 무엇인지 추론하게 된다. 즉, 프로이트가 재구성 작업이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증상의 발생 경로를 역추적해 보는 것이다.
2.3. 몰입
몰입은 청취의 절정에 달하는 단계로 불현듯 찾아와 분석가를 집중하도록 만든다. 환자의 어떤 특정한 표현이 누적된 대화 속에서 분석가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가 바로 도구적 무의식이 빛을 발하는 순간, 환자와 분석가의 무의식이 합치되어 환자의 무의식이 환상으로 떠오르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주마등처럼 몇몇 장면들이 스크린처럼 상연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분명 환자로 인해 촉발되지만 명백히 분석가 안에서 반응된 것이기 때문에, 대화 중에도 내면의 반응에 자신을 맡길 때에만 접할 수 있다. 저자의 용어로 의도적 폐제 (정신분석가의 자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각에 대한 억제) 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도 프로이트를 인용한다.
프로이트는 1923년에 다음과 같이 썼어요. “분석가는 자기에게 온전히 몰입할 때, 자신의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에 온전히 기댈 때, 사유와 의식적인 관념들의 가공을 멈출 때, 그리하여 자기 무의식으로 환자의 무의식을 포착해 낼 때 가장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p. 47
2.4. 동일시
몰입과 동일시는 사실상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을 듯 싶다. 몰입을 통해 떠오른 환상을 바라보며 환자의 과거 고통을 선명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분석가는 현재의 환자와 어린시절의 환자 모두에게 공감하게 되는 이중의 공감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정신분석적 공감의 특이성은 무엇보다 환자가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억압된) 트라우마적 감정까지 느낀다는 데 있다. 현재를 옭아매고 있는 환자의 과거 감정을 불러와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2.5. 해석
해석은 환자의 무의식과의 동일시를 통해 발견한 트라우마적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은 환자가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해석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앞선 과정, 몰입과 동일시를 통한 깊이있는 공감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며, 다른 누군가가 아닌 환자만의 고통임을 염두해 상투적인 표현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이미 외부에서 들었을 법한 이야기는 그 표현이 아무리 정확하다 할지라도 식상함으로 인한 실망감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몇 안되는 비판 – 환자의 고통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전통 정신분석에 대해 – 을 가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따라서 해석의 언어는 이론적이거나 기법적 표현이 아닌 평이한 단어를 사용해 조심스럽게 제안해야 함을 강조한다. 앞서 설명한 청취의 전 과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청취 과정의 본질을 한 구절로 요약하라 한다면, 저는 아래처럼 말할 것이 분명한 분석가의 무의식을 대신 답할 것입니다. “제 내면에 고요가 자리 잡고 나면 저는 환상 장면의 형태로 제 영혼에 밀려들어오는 내담자의 무의식을 포착해요. 그런 다음 그 주인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액션에 동참하죠. 그 환상 장면을 다시 불러내 제가 그것을 연기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마침내 그걸 말로 옮겨서 내담자에게 전달해 주죠.”
pp. 60 – 61
3. 해석의 결과, 치유
환자들은 각각의 두려움을 안고 있다. 특정 사건으로 인해 각인된 지나친 자극이 불안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모르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만족을 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증상을 일으킨 사건과 유사한 경험이 고통을 강화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해석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려 준다. 인지적으로는 잘못된 해석에 머물러 있던 것, 즉 모르는 것을 알게 하고 정서적으로는 아는 것에 대한 상상적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의식하게 한다. 한마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새롭게 된 정의’의 감동을 통해 두려움의 크기가 경감되는 것이다. 물론 매우 드물게 한 번의 해석만으로 증상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몇 년에 걸친 이해를 통해 치유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환자는 불안으로 인한 갈등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자아가 됐든 타자가 됐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갈등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된 해석의 결과로 치유된 환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런 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보다 관대한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는 분석가의 해석 뿐 아니라 그의 인격, 갈등을 대하는 삶의 태도 등 많은 것들을 수용한 결과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자신이 환자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자신은 전심을 다해 치유하나 치료하시는 건 알 수 없는 그 분이라며 솔직하게 고백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증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하나의 경향으로 남아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더 이상 환자가 아닌 내담자의 삶을 돕게 된다. 병인에 대한 의미있는 이해, 무의식의 의식화가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 위키백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
* 표지 이미지 출처 : ttmk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