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020년 7월부터의 글쓰기 (* 참고글 : 글쓰기에 진심이었던 지난 시간) 를 돌아보며 깨닫게 된 것은, 글 개수가 확 줄었던 작년 한 해 동안의 흐름이 생각만큼 많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연도 별 비교를 위해 2020년 전체 글 작성 수를 세어보니 53개였다. 18개를 작성한 작년 대비 3배 가량 글을 더 썼던 셈이다.) 물론 누가 시켜서 했던 것도 아니고, 바쁜 와중에도 악착같이 시간을 내 고민하며 글을 써왔던 것이기에 문득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물론 이미 인식하고 있는 중요한 계기는 있었다. 2012년부터 2020년까지 9년 간 이어졌던 상담 기간 동안 나의 글들 (당시에는 주로 일기들) 을 꾸준히 봐주셨던 ① 교수님의 칭찬들, 그리고 그 분이 이끄시는 독서클럽에도 수 년간 참여하면서 ② 정말 좋은 책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사회생활 이후 경험했던 중요한 이벤트들을 한 번 정리해 봤다.
- 2009년 사회 생활 시작
- 2009년 12월 3일 네이버 블로그 첫 번째 글 등록 (이후 방향성 없는 글들 가끔씩 남김)
- 2012년 3월 ~ 5월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 읽고 100일 간 33권 읽고 기록 남기기
- 2012년 하반기 정신분석 상담 시작
- 2014년 1월 교수님 독서클럽 참석
- 2015년 10월 결혼
- 2016년 9월 『당신의 가설이 세상을 바꾼다』 현재 형식의 첫 번째 서평글 작성
- 2016년 9월 첫째 출산
- 2017년 3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시작으로 글 작성 시동
- 2018년 다섯 번째 직장 생활 시작
- 2018년 6월 페이스북에 첫 육아일기 게재
- 2018년 8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첫 브런치 글 게재
- 2018년 11월 『사도바울』 글 작성 (글 정리, 쓰는데까지 3개월 걸림)
- 2018년 독서클럽 참석 종료
- 2019년 3월 블로그에 첫 육아일기 게재
- 2019년 6월 ~ 12월 성장판 서평단 활동 1, 2기 참여 (2주에 한 번 글쓰기)
- 2020년 5월 상담 종료
- 2020년 8월 일곱 번째 (현재) 직장 생활 시작
- 2020년 57개 글 작성
- 2021년 4월 둘째 출산
- 2021년 18개 글 작성
2020년의 폭발적인 글 작성의 배경에는 상담과 독서클럽, 그리고 서평단 활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상담 이전부터 성장에 대한 강한 갈망이라고 하는 씨앗을 품고 있긴 했지만, 앞서 언급한 과정들이 빛과 거름, 그리고 바람처럼 다양한 자극을 주었기에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었다. 한편으로 2020년은 홀로서기라는 시험대에 놓여진 시기이기도 했는데, 그런 점에서 (갑작스럽게) 상담이 종료되기 전까지 꾸준히 글을 쓰고 의견을 들어 두었던 것은 정말 잘한 일 중 하나였다. 어느 때부턴가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글을 보여드리는 것이 정례화 되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철학이나 정신분석 등 전문 서적들에 대한 글을 쓰는 것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읽었던 전문서적의 대부분을 교수님은 이미 정리까지 끝마치고 독서클럽의 패널 분들 (목회상담학과 박사과정생들) 을 지도하고 계신 상태였다. 따라서 이성적인 면과 감정적인 부분이 조화롭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글을 쓴다는 교수님의 반복된 평가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고, 덕분에 글쓰기에 대한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질 수 있었다. (참고로 교수님은 2020년 5월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 2년마다 2~3개 지역 독서클럽의 프로그램을 새롭게 갱신하며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마지막 해에는 매주 3권의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고, 지도를 하시는 경지에까지 다다르셨고 말이다..;) 이처럼 삶에서 다시 하기 힘든 존경과 지지 경험을 오랫동안 이어왔기에 지난 2019년 5월과 같은 고백이 나올 수 있었다.
나의 의식을 바꾼 것은 7할이 책이었다. 갇혀 있었던 생각의 틀 속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내 감정적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유일한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했던 것은 아직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잘 소화해서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이 주는 기쁨, 그리고 그것이 일시적 만족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바꾸고 누적되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듯 나는 너무나도 진지한 사람이다. 간편함, 가벼움, 안락함, 즐거움의 추구가 갈수록 주류로 자리잡아가는 오늘날 나의 이런 성향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주저했고, 그저 읽기만, 그리고 생각들을 정리하지 않은채 머리 속으로만, 또는 일기로만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글을 더 적극적으로 쓰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삶 가운데서 정말 닮고 싶은 롤 모델이자 존경하는 교수님 (일평생을 진리 탐구에 헌신하고 계신) 께서 나의 이런 글들을 보시곤 정말 잘 쓴다고 따뜻한 격려를 해주신 덕분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글에 대한 작은 확신을 갖게 되었고, 차차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글쓰기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도중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출근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인데 주책맞게 계속해서 훌쩍이고 있다. 하지만 이 눈물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단단한 내면의 성에 갇혀 있는 작은 어린아이였는지를, 누군가 나의 고통을 이해해주고 꺼내주길 정말 간절히 바라는 그런 아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 준 것이 그 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정확히 그런 점에서 이 눈물은 감동과 감사의 눈물 그 자체였다. 일반적으로도, 또한 수 많은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존재 자체로도 귀하다는 것을 이제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카우아이 섬 아이들의 경험처럼 나 혼자만의 힘으로가 아니라 나 자체가 이미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경험, 즉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경험을 하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기독교가 전해야 할, 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구원의 열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 아닌가? 물론 난 아직 턱 없이 부족하다. 나이가 많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적다고도 볼 수 없는 나이에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당장 글을 이렇게 열심히 쓴다고 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유튜브처럼 합리적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젠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꾸준히 준비해 두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하는 절박함이 강한 동기가 되어 나를 이끌고 있을 따름이다. 연습을 위한 의지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 앞서 나의 의식을 바꾼 7할이 책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행위로 이어지게 한 것은 존경하는 대상으로부터의 총애 경험을 통해서였다. 책의 기여도가 설령 100%가 될지라도 이는 변치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나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동기는 바로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도 읽으면 글을 쓰던 당시 상황이 떠오르며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그 감정이 오롯이 재현되지는 않기 때문에 남겨놓았던 이 글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지금에 와서 이런 글을 쓴다면 감정이 뒷받침되지 않아 밋밋하고 간결한 설명만 늘어놓게 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회생활 초 스스로 한 없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열등감에서 시작된 글쓰기는, 교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방향과 틀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과거의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이제는 교수님이 계시지 않는 가운데서도 글을 중심으로 한 삶의 방향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뒤에는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공부를 계속해 오셨던 어머니의 도전이 있었다 (어머니는 교수님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중이시다). 만약 이 조건들 중에서 하나라도 틀어지는게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울증은 극복할 수 있었을까? 결혼은? 아이는..? 아마 결혼을 할 수는 있었겠지만,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분노로 인해 불화가 끊이지 않았을 것 같고, 자연히 아이도 갖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너무 비관적인가? 사실 전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을거라는 점만큼은 분명할 것 같다.
내가 내세울 게 없는 이유, 그것은 암울한 시기를 벗어난 결정적인 계기가 외부로부터 주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에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비하할만한 어떤 이유도 없다. 그만큼 괴로웠고,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거저)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어진 은혜의 크기에 비한다면 여전히 보잘 것 없는 것이다보니, 자랑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그저 묵묵히 내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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