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월의 매일 글쓰기 도전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까지 써봐야 8개 (목표 21개) 에 불과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사실 글을 공유하지 않았던 기간에도 글을 계속 써왔던 것을 생각하면 살짝 억울하긴 하지만, 이제는 편하게 마음먹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매일 글을 마무리 짓는 것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육아로 인해 주중, 주말할 것 없이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언가 성취감이 있어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기준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매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가볍게 쓰면 되지 않느냐는 조언도 있었고, 애초에 그런 마음으로 참여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이 신념은 글의 형식을 넘어서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기를 쓰더라도 그것이 ‘공유를 위한 것’이라면 ‘나눌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무언가’가 생길 때까지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지만, 그것이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였고, 쓰게 한 원동력이었기에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넘어 바꿔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쓰기와 긴밀하게 연결된 나의 증상. 글을 매일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매일 완결지을 순 없다. 매일 글쓰기를 통해 알게 된 나의 한계였다.
1. 실패를 통해 깨닫게 된 것
이처럼 목표만 놓고 보면 실패가 분명했지만, 고민의 흔적들을 돌아보니 생각보다 의미 있는 열매들이 많이 남겨져 있었다. 첫 번째는 전보다 나를 더 정확히 알게 됐다는 점이다. 글쓰기에 대한 소신을 꺾을 수 없다는 것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이면 글쓰기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좋은 예였다 (이 글이 일주일 내내 진전이 없었던 이유기도 했다). 두 번째는 나만의 생각을 남길 수 있는 공간 (카테고리) 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던 건 좋은 책을 소개하고 싶어서였고, 관찰과 분석이 주인 육아일기로 넘어갔지만, 나 자신만을 두고 글을 써본 적은 없었다. 이 부분도 첫 번째 신념 –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 과연 공유할만한가 – 과 맥을 같이하는데, 매일 글을 남기기 위해서는 이런 고민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었다. 무슨 글이든 일단 써서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료 없는 글쓰기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영역을 넓힌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오랜만에) 한 달 동안 7개의 글을 썼던 것도 작은 성과였고 말이다.
2. 만족의 기준이 높은 이유에 대하여
이처럼 환경의 변화 덕분에 떠안게 된 고민은 결과를 떠나 개인적으로 많은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이제 남아있는 궁금증은 이런 소신이 어디에서 비롯됐냐는 점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나는 왜 이렇게 만족의 기준치 (역치) 가 높은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사실 챌린지를 통해 부각되었을 뿐 이 문제는 삶의 모든 선택과 관계된, 나의 역사 – 무의식적 구조 – 에 대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성향은 스스로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기 때문이다.
2.1. 인정 실패에 대한 두려움
무엇보다 속도가 느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업무에서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는데, 사회 초년생일 때는 아직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깊이 파고들기만 해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두고 진지한 (과도한) 결론을 내놓기 일쑤였다 (산책하러 나가는데 등산 장비를 갖추려고 하는 것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만 많다 보니 쉽게 저지르기 힘든 경향과, 막상 시작하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조금만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준비부터 실행까지의 과정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정확하게는 내 생각이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망설임의 원인이 되어 스스로를 끝도 없이 갉아먹었다.
이러한 인정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작용됐다. (인정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눈치를 많이 보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하게 됐지만, 그러면서도 인기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 스스로를 비난하는 강도는 점차 강해졌다. 여기에서도 ‘내가 타인에게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받기 위한 인정 욕망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런 생각에서 아주 자유로워졌지만, 10대 때부터 20여 년간 느껴온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우울감은 상당했다. 말 그대로 고뇌하는 인간 자체였는데, 그나마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그렇지 못한 현실 속에서의 갈등이 성장을 향한 강한 갈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딱히 희망이 있어서였다기보다는, 차마 삶을 포기할 만큼의 용기가 없어서 몸부림쳤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2.2. 두려움을 넘어서게 했던 것
인정받기 위해 돌다리를 지나치게 많이 두드려 보는 성격, 그러니까 섣불리 도전하는 것이 두려워 끝없이 파고드는 성격은 자기검열의 기준을 계속해서 높여 놓았고, 삶의 많은 요소를 의무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13년의 사회생활 기간 중 첫 회사만 대기업이었고 (1년 6개월), 이후 6개 회사에 다니면서 갈수록 작은 회사 (스타트업) 로 옮겨갔던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대기업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울 것 같아 상대적으로 쉬운 회사들을 선택했던 것일까? 아니면 궁극적인 결과로 인정받기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했던 것이었을까? 굳이 꼽자면 후자 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이보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①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
(이 회사의 명함은 내 것이 아니다. 공동창업 멤버가 된 지금 회사에서는 그런 생각이 확실히 덜하긴 하다.)
② 어차피 은퇴할 때까지 다닐 것도 아니고 은퇴한 뒤의 삶을 살려면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③ 이미 시스템이 잘 갖춰진 환경에서 부분적인 업무를 경험하는 것은 ②번의 문제도 있지만, 재미도 없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이 첫 번째 생각이었다. 내가 만들었다고 여길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신입의 패기였을 수도 있지만, 중학생 때 소니 워크맨에 반해 이런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를 꿈꿨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역사는 제법 오래된 일이긴 했다.
이쯤 해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만족의 기준이 높았던 이유는 인정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였다. 하지만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기 때문에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 만약 인정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었다면, 달리 말해 자신감이 부족했다면 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의 강도도 강했지만, 내 것에 대한 욕망의 강도가 더 강했다는 것에서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이 질문의 근본적인 원인, 애초에 욕망의 강도가 왜 그렇게 강했냐는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욕망의 궁극적인 원인 (신경증에 대한 정신분석적 설명)
늘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나는 정말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길지 않은 인생 가운데서 좋은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뱃속에 품으셨을 때부터 기도하셨던 만남의 축복은 분명히 실현되었고, 실현 중이며, 지속해서 실현될 것이라 확신한다.
나라는 존재의 출발점에는 사람들을 살리고 성장시키기 위해 일생을 헌신하셨던 어머니와, 삶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술에 헌신하셨던 아버지가 계셨다. 아버지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8년 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정성을 나에게 쏟으셨고, 15세 (중 2) 가 되던 해에 결국 이혼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자신이 직접 공부하셔서 목사이자 정신분석 상담사가 되셨고, 아버지는 경비원 생활을 마치고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셨다 (연락이 끊긴 지는 꽤 오래됐다). 아마도 내 욕망의 궁극적인 원인은 이 두 분의 모습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어머니와 자신의 무능력으로 인해 무시될 수밖에 없는 아버지. 가족 내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아버지는 어머니에 의해 소외되고, 아이는 정신적으로 어머니만의 소유가 된다. 신경증의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나지오 박사는 라캉 정신분석 강의에서 신경증을 대타자의 향락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다.
만일 여러분이 신경증 환자란 무엇인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절대적 향락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주저 않고 정의할 겁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향락하지 않는 방식은 가까스로 향락하는 방식, 다시 말해, 자신의 욕망을 부분적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신경증 환자가 최대한의 향락(대타자의 향락)을 피하기 위해 부분적으로만 향락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증상(남근적 향락)과 환상(잉여향락)이 바로 그것입니다. 증상과 환상은 사실상 측량할 수 없는 향락에 맞서고 그것을 제지하기 위해 신경증 환자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장 다비드 나지오, 『자크 라캉 핵심 이론과 임상』, pp. 55 – 6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상 (대타자) 의 사랑이 과도하게 다가와 (이해될 수 없는 향락)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증상 (강박증 또는 히스테리) 을 만들어낸 것이 신경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녀 사이 (이자 관계) 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신경증적 구조는 완성되고 강화된다. (* 참고 글 : 한국 사회가 강박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3. 부모의 성장이 중요한 이유
(한국에서 특별한) 첫째이면서 오랜 기간 독자였던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이상을 대리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어머니가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요구하기도 하셨지만, 칭찬도 못지않게 해주셨다는 점이다. 내 것을 만들어 자랑하고 뿌듯함을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됐으나, 미지의 존재였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아버지와 즐거웠던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높은 기대가 어우러져 갈등은 항구적으로 내면화되었다. 아마 어머니가 이혼 후 공부를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가족은 진작에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우리는 누적된 분노의 원인인 부모를 향한 원망을 쏟아냈을 것이고,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어머니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상담 공부를 통해 자신의 과오 (절제되지 않은 사랑의 열정이 지독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를 깨닫고 나와 동생의 분노를 감당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씻어내는 애도 기간을 가질 수 있었고, 서로를 깊이 받아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아버지 (교수님) 를 만난 것도 어머니 덕분이었고, 회사에서 인생의 멘토라 할만한 선배를 만난 것도, 갈등으로 충만한 나를 잘 포용해 준 아내를 만난 것도, 감히 결혼과 두 자녀를 낳을 수 있었던 것 모두 어머니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얼마 전 어머니가 책을 내셨을 때 병 주고 약 주셨다는 표현을 했었던 것, 자신의 욕망을 자녀에게 투사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삶으로 자신의 믿음을 살아내셨던 덕분에 지금의 우리 가족은 존재할 수 있었다.
분명 만족의 기준이 높았던 것은 내면의 긴장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 그것은 수 십 년간 이어져 온 나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방어기제이자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갈 곳을 잃을 수 밖에 없었던 과도함은 인생에서 만난 중요한 멘토들 덕분에 나만의 가치라고 여기는 확신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나의 많은 고민들이 상당 부분 옳았다는 것, 깊이 파고드는 능력과, 글쓰기를 통해 무언가 해낼 것이라고 여겨주신 분들 덕분에 글쓰기를 대하는 나의 증상은 새롭게 형성될 수 있었다. 막연히 완벽주의라고 생각해 왔던 것에서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 것, 이번 글쓰기가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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