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투표 참여율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정치에 대해 극심한 분노와 회의감을 경험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전국 투표율 56.8%, 안산시 전체 투표율 48.1%) 이럴 때 단골로 등장하는 원인은 바로 ‘냄비근성’이다. 냄비처럼 빠르게 달궈지고, 또 빠르게 식는 것에 빗대어 우리나라의 국민성을 표현한 것인데, 정작 그러한 ‘냄비근성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을 접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의무를 포기했으니 권리를 주장하지 마라’는 말, 물론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판단하고 비난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에 대해서 한 번쯤 짚어보고 싶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첫 번째 질문이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투표 참여율이 저조할까? 였다면,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을 뒷받침해 줄 두 가지의 연관된 질문이 더 있다.
둘째, 우리나라 기업은 왜 자국민을 소위 ‘호구’로 볼까? 외국에 수출하는 제품은 엄격한 품질기준에 맞춰 생산하고, 가격도 더 저렴하게 판매하면서 정작 우리나라는 불량품을 더 비싸게 사야되는, 왜 그런 취급을 당해야만 할까? 해외 직구가 활성화 되고, 질소 사니까 과자를 덤으로 주고, 차에 물이 새지만 고객님 잘못이거나 등등,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닌 상황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셋째, 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문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문자를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지 못할까? 어제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을 다녀왔다. 주차장으로 진입할 때 각 나라말로 ‘환영한다’는 인사말이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나라 말은 없었다. (예상했겠지만 Welcome이라는 단어가 가장 컸고 말이다.) 파주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도 똑같았다. ‘Seoul Welcomes You’라고 친절하게 영어로 표기를 해줬지만, 역시나 우리나라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걸까?
대략 이런 질문들이었다. 물론 비슷한 맥락의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더 던져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왜 우리나라는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것을 중요하게 여길까? 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관광지를 찾기 어려울까? 왜 프랜차이즈가 성행할까? (떴다 하면 왜 우르르 몰릴까?) 왜 요즘 아이돌들은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울까? 등등 말이다.
사실 글로 표현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 사회가 아직 ‘피학적인 문화’ 속에 있어 개개인의 ‘진정한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욕망은 외부의 폭력 앞에 억압되고 유리된 채 ‘내가 아닌 나’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이루었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가 가진 무언가가 침해당했을 때 적절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모른다. 극단적인 선택(자살, 폭력 등)을 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회피해 버리거나 둘 중 하나가 될 뿐, 중간지점을 갖기가 너무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다고 반발심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또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방법 중 하나는 대체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였을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일이요, 유교적 전통 하에서도 ‘불효’로 취급받았으니 말이다. 일제시대, 군부체제를 겪으며 수용된 우리의 교육도 이러한 ‘억압’을 강화하는데 만만치 않은 역할을 했다. (청소년의 높은 자살율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심지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에서도 가장 중요시 했던 덕목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나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강조한 것은 사랑을 빙자한 ‘순종’이자 ‘희생’이었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은 뒤로한 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목사님께, 교회에 헌신할 것을 공공연하게 강요받았다. 사랑에 대한 진정한 정의가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되어 사회적인 합의를 이뤄내기 보다는 단순히 ‘성경이라는 진리를 가진 목회자’라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종했을 뿐이었다. 오늘날 수 많은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사랑’을 얘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위와 같은 관점에서 첫 번째 질문을 해석해 보면 어떨까? 우리의 낮은 투표율은 이미 ‘투표를 해도 소용없다는 실패감’이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서가 아닐까. 점을 치고, 로또를 하고, 대박을 찾고, 이 같은 선택을 하는 심리 저변에는 ‘나는 어떻게 해도 안돼’라는 무기력감을 투영하고 있진 않은가 말이다. 그 배경에는 삶에서 단계적으로 경험하는 다양한 발달과제들(문제들)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풀어나갔을 때의 성취감을 충분히 느껴보지 못한채 몸만 성숙해 버린 우리의 미숙한 ‘주체’가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미숙함이 나의 작은 행동의 변화가 어떤 큰 변혁을 일으킬 수 있을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버렸을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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