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한글을 뗀지도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났다. 작년 7월 무렵 (58개월, 만 4세) 에 이 글을 쓰려다 아직 섣부르지 않나 싶어 미뤘던 것이 해를 넘겨버린 것.
그래도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보다 어느 정도 습관으로 자리잡을 때까지 지켜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 글 중 ‘혼자 잠들기’라든지, ‘식사 때 돌아다니는 문제’도 몇 차례 성공 후 자리를 잡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1. 한글떼기의 과정
아이는 한글을 읽기 전까지는 그림만 보면서 자기 마음대로 읽더니, 어느 때부턴가 글자에 관심을 갖고 쉬운 것부터 조금씩 따라 읽기 시작했다. 막히는 게 있을 때는 물어보기도 하면서 더듬 더듬 읽었고, 희한한 형태로 따라 그리기도 하면서 점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해 나갔다. 어느덧 유치원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은, 웬만한 글들은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주기적으로 보는 받아쓰기 시험도 무난하게 치르고 있어 고맙고 대견한 마음이 든다.
사실 아이가 한글을 익히기 전을 돌아보면 우리도 어떻게 가르쳐줘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한글 교재를 사서 조금씩 가르쳐줘야 할지, 그러려면 재미있게 공부할만한 책을 찾아야할텐데 관련 책들을 찾아보고 비교해 봐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아무래도 한국 학부형으로서의 소양이 부족한 듯 싶다). 이 때문에 유치원에서 가르쳐주겠거니 하면서 차일피일 미뤄왔던 게 솔직한 상태였다. 그런데 아이가 알아서 한글을 떼면서 큰 시름을 덜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물론 음을 표기하는 한글의 특성상 익히기 쉽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겠지만, 아이 관점에서 그 규칙을 이해하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텐데 어떻게 스스로 학습하게 됐을까? 이 질문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2.아이는 어떻게 혼자서 한글을 뗄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했을 때 꼽아볼 만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자 애썼던 것
② 공부가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직 · 간접적으로 알려주고자 했던 것
③ 잠자기 전에 꾸준히 책을 읽어줬던 것
1번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에 개입하기보다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기다려줌으로써 노력 끝에 찾아오는 뿌듯함을 자주, 또 직접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뤄졌다. 2번의 경우는 앞으로 일생동안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살아가야 할 아이가 공부를 지겹다고 여기거나 압도되지 않도록, 그렇게 신체적인 성취감을 정신적 성취로 이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책읽고 글쓰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을 의미한다. 아내에게도 공부를 강요하는 순간부터 성장의 전 과정이 어려워질 수 밖에 없음을 여러 차례 강조해, ‘책을 읽으라’거나 ‘공부를 하라’는 요구가 은연중에라도 나가지 않도록 했다. 숙제의 경우는 어쩔 수 없었지만, 될 수 있는 한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준 뒤 설명해 주거나, 필요하면 같이 찾아보는 식으로 깨닫는 과정의 즐거움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빠에 대한 함축된 이미지 (별명) 가 ‘공부쟁이’였던 것이 늘 뿌듯했던 이유였다. 어쩌면 이런 가치관을 토대로 꾸준히 책을 읽어줬을 때 아이는 어느 순간 ‘재미있는 책을 나도 잘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 건 아니었을까? 반복적으로 누적된 성취감이 어려운 한글을 지속적으로 학습할 끈기를 제공하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면 아내는 곧바로 이렇게 반문한다. 아이가 원래부터 언어 능력이 뛰어나서 그럴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 말은 ‘내 아이가 정말로 뛰어나서’ 라기보다는, ‘아이의 성취를 부모의 공으로 너무 섣불리 돌리는 것 아니냐’는 염려가 담긴 의문이었다. 입증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확신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분명 맞는 말이고 실제로 그 부분에 대한 염려가 글쓰기를 미뤘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유기적이고 복합적으로 이뤄지는 내면세계의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밝혀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원인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성취란 어려울수록, 불가능해 보였던 일일수록 이뤄냈을 때의 가치와 감동도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한글떼기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진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가치관이 그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무언가가 아니라 한결같이, 확신을 갖고 실천하고자 노력해왔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의 오랜 중심 주제인 ‘성장’, 무엇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동경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핵심적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마음은 누가 억지로 떠민다고 가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스스로 이끌렸을 때에만 진정한 동기, 즉 지난한 과정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만한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경하는 마음은 그 대상을 좋다고 여기는 어떤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고, 그 가치관은 상당 부분 가정에서, 즉 부모로부터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완벽하게 무기력한 존재로서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또 오랫동안 의존하게 되는 대상이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내가 닮고 싶은 존재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잘하고 싶다고 여기는 것, 즉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칭찬 (인정) 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욕망이다. 라캉식으로 대타자 (아이가 특별한 존재라고 인정한 사람, 일반적으로 엄마) 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의 사회적 특성상 아이는 부모의 가치관과 문제해결 방식을 좋든 싫든 깊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① 자율적 학습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지지를 받았고, ② 무엇보다 관심있는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즐거운 것이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부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질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단지 한글의 경우에만 해당됐다면 이런 주장에 의심을 품을수도 있었겠지만, 아이의 관심은 이후 한글에서 숫자로, 알파벳으로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오랜만에 찾아본 책 『그릿』 (그릿은 열정적 끈기를 뜻한다) 에서도 이런 믿음을 지지해주고 있었다.
지지와 존중, 높은 기대 속에서 성장할 때 유익한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하나가 특히 그릿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로 현명한 양육방식 (애정과 존중, 기대와 강요를 함께 제공하는, 다정하면서도 엄격한 권위적 양육방식, 필자 주) 은 자녀가 부모를 본받도록 고무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사랑해주고 존중해주고 기대와 요구를 하면 우리는 그들의 본보기를 따를 뿐 아니라 그들을 존경한다. 부모의 요청을 준수할 뿐 아니라 부모가 그런 요청을 하는 이유도 이해한다. 특히 부모와 같은 관심사를 추구하기를 갈망한다…. 블룸의 연구에서 지지해주고 요구하는 부모들은 거의 예외없이 근면함의 모범을 보이는 존재로 열심히 일한다는 평을 받았고, 자신이 하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일을 다 끝내고 놀아야 하며, 장기적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에 자녀가 참여하도록 권하는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블룸이 연구를 요약하며 내린 결론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모 자신의 관심사가 어떻게든 자녀에게 전달됐다……. 우리는 피아니스트의 부모가 테니스 강습에는 자녀만 보냈지만 피아노 레슨에는 함께 갔다는 이야기를 누누이 들었다. 그리고 테니스 선수의 가정에서는 그 반대였다.
사실 가장 존경하고 영향을 많이 받은 롤모델이 부모님이라고 말하는 그릿의 전형이 어찌나 많은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들은 부모님에게 자부심과 존경심을 느꼈다. 너무나 많은 그릿의 전형이 어떤 식으로든 부모와 매우 유사한 관심사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이들 그릿의 전형들은 부모를 흉내 냈을 뿐 아니라 본받으면서 성장한 게 분명했다…. 자녀에게 그릿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먼저 당신 자신이 인생의 목표에 얼마만큼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해보라. 그런 다음 현재의 양육방법에서 자녀가 당신을 본받게 만들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자문해보라.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매우 강하다’이고, 두 번째 답이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면 당신은 이미 그릿을 길러주고 있다.
앤젤라 더크워스, 『그릿』, pp. 283 ~ 286
3. 책을 꾸준히 읽어주게 된 계기
반복된 성취감이 도전을 위한 토양이 돼 주었다면, 한글을 떼게 된 실질적인 계기가 ‘책 읽어주기’에 있었으므로 그 과정에 대한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책을 매일 같이 읽어줄 것을 처음 목표로 정한 것은 3년 전의 (2019년 12월, 39개월) 일이다. 그 전에도 나름대로 읽어주고는 있었지만 부족함을 느껴 강제성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목표로 정하고 나서도 읽어주는 빈도가 곧바로 높아지지는 않았지만, 해가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야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모든 요구를 최대한 받아주고, 충동과 공격성을 잘 조율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됐지만, 이제는 유치원에 가게 되면서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해 5월에서 9월까지 작성한 교육 관련 글들은 당시의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고민의 시간 덕분에 분명한 소득은 있었다. ① 퇴근 시간이 늦어 책읽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던 문제는 유대인의 가정 교육 방법 중 ‘잠자기 전 책읽기’ (베갯머리 독서) 를 적용해 해결할 수 있었고, ② ‘어릴 때 책을 읽어준 빈도가 높을수록 자녀들이 책을 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2019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를 통해 확신을 갖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19년과 21년은 기준값이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우나 유사한 분포를 보이고 있어 신빙성을 높여준다.
2019년도 : 부모님의 그림책 읽어주기 빈도 (291명 대상)
2021년도 : 부모님의 책 읽어주기 빈도 (3,320명 대상)
보다시피 책을 거의 매일 같이 읽어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빨간선 영역) 유의미한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어렵다. 책을 아예 읽지 않는 아이나, 1년에 20권을 넘게 읽는 아이 모두가 균등하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매일 같이 읽어줄 경우 (파란선 영역) 다독의 확률이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은 습관을 공고히하기 위해서는 오랜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아이가 책을 많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그저 책읽기를 좋아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기에 ‘열심히 읽어줘야겠다’는 결심만 굳게 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도 양이 없는 질은 불가능하니 많이 읽게 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역사상 가장 빠르게 진보 중인 기술과 거북이 걸음 중인 교육의 변화 속도에서 오는 시차는 우리를 갈수록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분명 타율적 교육의 시기는 급속도로 저물고 있는데, 여전히 기댈 것이라곤 공부 밖에 없어 갈팡질팡 하다보니 교육비 대비 최악의 생산성이라고 하는 안타까운 한계에 봉착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기대야 할 것은 아이의 주체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주는 일 뿐이라고 굳게 믿는다. 더 빨리, 더 많이 도전하고 실패하고 깨달아 갈 수 있도록, 괴롭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며 격려해 주는 것. 그 과정에서 새겨진 단단한 마음의 근육이 어떤 상황에서도 방법을 찾아나서게 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한글을 뗄 것을 기대한 적이 없었지만 뜻밖의 선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그런 삶이 분명히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표가 아니었을까.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