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대할 때 기억해야 할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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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

아이와 놀이터에서 함께 있는데 어떤 아버지가 아이를 다그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ㅇㅇ야, 아빠가 하지 말랬지! 그렇게 하지마!”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아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억누르기만 하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쾌한 마음만 갖게 되지 않을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도 모른채 앞으로 자신이 하게 될 많은 생각이 잘못된 것 아닌지 의심을 품게 되진 않을까? 왜 아이를 좀 더 편하게 받아주기 어려운 걸까? …… 그럼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질문은 아이를 대하는 나만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정리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주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를 대하는 순간마다 ‘어떻게 해야지’라고 하는 기준들은 분명 있었다.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선택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중요한 잣대 말이다.

1. 아이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주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자, 또 그만큼 어려운 것은 특별히 위험하거나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의 주관적인 생각과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것이다. 앞서 육아일기에 기록했던 것처럼 동기부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이가 어릴수록 이해되지 않는 아이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우리 아이의 경우 첫 돌 이후 걷기 시작하면서 다른 것보다 계단 오르내리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 계단만 만났다 하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무한 반복했다. 어느 정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 자리를 옮기려고 하면 여지없이 낑낑대면서 손을 잡아 되끌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계단놀이만으로 30분, 1시간이 훌쩍 넘어간 적도 있을 정도였고, 시간이 부족할 경우 계단을 피해가는 상황마저 벌어졌다. 얼핏보면 너무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선택을 고수했던 이유는 아이가 느꼈을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도록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렇게 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보니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아래 책은 다수의 유아와 어머니와의 관계 관찰을 통해 아이의 발달 과정을 객관적으로 살펴본, 심리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책으로 꼭 한 번쯤 읽어보시길 추천드리고 싶다.

아동의 정서 발달에서 보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행은 자신의 통제능력과 마술적 지배를 믿고 있는 아동에게 현실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아동의 현실검증 능력을 크게 증대시킨다. 그리네이커가 말하듯이, 그것은 ‘또한 직립자세 및 보행능력의 획득을 수반하는 일반적인 신체적 쾌락 및 감각 반응이 급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1968, p. 51).
마가렛 S. 말러, 프렛 파인, 애니 버그만, 『유아의 심리적 탄생』, p. 112

누워서만 세상을 바라보던 아이는 차차 힘을 키워 뒤집기에 성공하고, 어느 순간 기어다니다가 걷기를 통해 전혀 다른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를 경험한지 수 십년이 지나버린 우리들은 아이 관점에서의 기쁨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분명히 이전 경험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행동들이 가능하게 된 일종의 생물학적 진화라고도 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의 전능감에 한껏 부푼 아이가 그 성취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하는 행동들을 결코 허투루 여길 수 없었던 것, 그것은 필자의 인내심이 특별히 많아서가 (결코) 아니라 책을 통한 가르침 덕분에 가능했다. 현재 아이의 선택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걷기에서 계단 오르내리기, 숨바꼭질, 그네타기를 넘어 공주옷 입기, 블럭쌓기, 퍼즐 맞추기 등으로 그 방향이 점점 더 지능적이 되어 간다. 아마 이런 과정들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른들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과 성취감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 믿는다.

2. 알아듣지 못해도 이유 설명해주기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할 경우 다급하게 금지시키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꼭 안되는 이유를 설명해주거나, 대안을 제시해 주는 방향으로 그 생각을 자연스럽게 틀어주고자 노력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아이를 존중하는 앞선 원칙이 전제되지 않고는 선택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 – 마하트마 간디

동물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표현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공감하며, 필자는 이를 이렇게 해석해보고 싶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개인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개개인의 사고방식이 모여 문화를 형성하고 국가의 수준을 이룬다. 한 때 아이, 여성에 대한 생사여탈권마저 쥐고 흔들었던 강력한 가부장제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과연 생명에 대한 존엄이 얼마나 가치있게 여겨지는지 약자들의 삶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 부끄러운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잊을 새도 없이 터져나오는 온갖 종류의 아동 학대 사례 뿐만 아니라 장애인 분들이 혼자서는 이동이 불가능한 열악한 시설들, 이들의 주거, 학습 공간에 대한 사회적 혐오 등을 통해 말이다. 이 때문에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필자에게 간디의 동물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은유로 더 와 닿았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아주 어린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어린 아이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애를 쓸만한 가치가 없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현실적으로 당장 눈에 띄는 반응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어느 때보다 견디기 어려운 시기라는 점도 적잖은 역할을 하는 듯 싶다. 하지만 우리는 또 한 가지 진실도 알고 있다. 언어를 듣지 못하면 말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태어난 뒤 일정 기간이 지나 아이의 언어와 표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그 기간동안 다양한 상황에서 쓰였던 어른들의 언어 때문이었음을 부정하는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늑대인간의 예처럼 생후 상당 기간이 지나서는 아무리 인간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은 태어나서의 단 몇 년이 모국어를 익힐 수 있는 절대적 시기임을 가르쳐 준다. (그 외의 다양한 감각들 또한 두뇌가 한창 발달할 시기에 자극을 받지 못하면 기능이 발달하지 못해 시력을 잃는 등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아이가 알아듣건 말건 말을 많이 걸어주고 다양한 상황에서의 표현을 적절히 알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언어는 무의식의 조건이다.……무의식은 언어의 논리적 결과이다. 따라서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다. – J. Lacan, 『서문』, in Anika Riflet-Lemaire, Jacques Lacans, Bruxelles: Dessart, 1970, p.18( 초판),1977, P. 14 (2판).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 1』, p. 168 에서 재인용

한편 위와 같은 생각은 라깡 이론을 공부하면서 더욱 단단해질 수 있었는데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필자의 이전 라깡 탐구 글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로 함축된 그의 명제 덕분이었다. 언어는 자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닌 역사 문화적 산물이다. 우리는 정교하게 짜여진 언어의 체계 안에서 사물을 정의하고 생각하며, 감정을 담아 표현한다. 언어를 통해 비로소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는 인류 진보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언어는 그것을 아무리 정교하게 구사하더라도 실존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창조성의 한계로 인해 언어적 표현에는 언제나 잔여물이 남는다. 라깡은 이러한 잔여물(잉여)을 무의식으로 정의한다. 결국 언어로 인해 상실된 경험은 우리를 욕망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점에서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다는 그의 표현은 한편으로 섬뜩하다. 아이에게 다양한 언어로 충분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면 성장을 향한 추동력 자체가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대안 제시하기

어느 것 하나 쉬운게 없다. 기다리는 것도, 혼잣말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렵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게 대안을 제시하는 일인 듯 싶다. 필자의 경우도 육아와 관련해서 방식을 바꿔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을 때 아내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경우 돌아오는 대답은 ‘그럼 어떻게 하라고? 오빠가 해봐’ 였다. 아마 앞에서 다그치는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의 심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사실 금지만 하는 것은 정말 쉽다. 마음에 안드는 부분을 지적하고 못하게만 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상대방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반발감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방법을 통해 마음을 달래주는 게 필요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방식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을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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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영상 캡쳐 : 유튜브>

 혹시 위 광고를 보신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유튜브에 워낙 자주 나와서 아마 많은 분들이 보셨을거라 생각되는데, 타일러가 미국식 영어 표현을 알려줘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뼈대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게 위 질문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위 질문을 받으면 일단 ‘Don’t’을 떠올리는게 일반적일텐데 타일러는 이는 영어식 표현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오히려 ‘Keep your coat on’ 으로, ‘옷을 벗지 마’가 아니라 ‘입고 있어’라고 하는 대안 제시적 태도가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짧은 영상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미국인들은 부정적인 메시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 이미 문화로 자리잡았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의 의사소통 방식도 돌아보게 했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넘어서서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대안적 언어를 제시하며 살고 있을까? 근래들어 많이 바뀌어가고 있지만 아직 그 DNA가 삶의 구석 구석으로 자리잡진 못한 것 같다. 대안을 제시하려면 내가 좀 더 발벗고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상대보다 더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한다. 그게 어려운 이유는 대체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더 나아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이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해결 방식을 익힌 아이는 우리 사회의 적체된 구석구석을 시원하게 뚫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될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그런 사람이 필요할테고 말이다. 이 때문에 광고를 접한지는 제법 오래 되었지만 한 번쯤은 꼭 글로 남기고 싶었고, 좋은 계기가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 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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