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7개월 차인 둘째는 말이 꽤 빠른 편이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나는 15개월 차 때 아이가 표현했던 단어들을 기록해 두었다. 엄마, 아빠, 까까, 뜌뜌, 맘마, 우유, 무~ㄹ, 빵, 또죠, 아이기유(아이귀여워), 아나(안아), 어부, 빠방, 하부지(할아버지), 꽃, 공, 슈웅~, 어이찌?(어디있지?), 여이따!(여기있다!), 없다, 뽀뽀 등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대상을 ‘까까’라고 부르더니, 점차 좋아하는 음식들 위주로 하나 둘 구분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둘째와 4년 7개월 가량 터울인 첫째의 경우, 같은 시기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별로 없었다 (비교해서 미안해..!). 찾아낸 표현은 엄마, 아빠 외에 귤(귀위)이 전부였고 다른 글, 영상을 살펴봐도 아이가 언어로 표현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둘째가 보통 빠르다고는 하지만, 손윗 형제를 둔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도 유별난 면이 있었기에 우리 부부는 암묵적으로 아이가 ‘똑똑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원인을 진단할 때 만큼은 언제나 평행선을 그리곤 했다. 아내는 ① 애초에 똑똑하게 태어난 것 같다는 입장 (선천적) 인 반면, ② 지능을 뛰어넘는 것은 부모의 양육 환경이라 보는 (후천적) 내 입장이 늘 맞서왔던 것. 물론 양쪽 모두 틀린 주장은 아닐 것이다. 증명하긴 어렵지만 아이가 분명 뛰어난 지능을 갖고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좋은 양육 환경만 제공받을 수 있다면 누구든 뛰어난 아이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1인으로서 (이미 양육과 관련해서 수 많은 연구들이 증언해 온 부분이기도 하다), 더 깊은 곳에서는 (나태한) 운명론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깔려 있었다. 물론 우리 부부가 대단히 뛰어난 양육 환경을 제공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똑똑하게 태어났다는 건가..?), 이 갈팡질팡에서 나름 확신을 갖게 해 준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1. 아이의 입원
둘째를 임신했을 때 아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병원에서는 출산 후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태어나자마자 생 이별은 좀 아닌 것 같아 고민이 됐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이는 것 외에 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았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제 때 검사를 해보는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예상 입원 기간이었던 일주일보다는 일찍 데려오겠다고 (홀로) 약속하면서, 아이는 집중치료실 (신생아 중환자실) 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의 동료 분이 찍어서 보내준 사진 (당시 아내는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였다) 을 보니 아이에 대한 막연한 염려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저기 줄을 매달고 있는 모습이 영 안쓰러웠던 건데, 이 모습을 보신 양가 부모님들도 걱정 일색이었다.
다행히 콧줄은 당일 오후에 뺐다지만, 엄마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계속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 여부를 확인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이 때문에 입원 후 2일 째 되던 날에는 퇴원을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마침 이상 없다는 통보를 받고 무사히 엄마 품으로 돌아와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2. 예민함의 변주
그래도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었기에 모두들 다행스럽게 여기고 이 사건은 매듭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서가 아니면 잠을 자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졸릴 때에는 엄마 외에 그 누구도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안아주고 달래줘도 더 심해졌을 뿐더러, 자리에 눕혀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아빠 품에 안겨 잠들기 시작한 건 정확히 생후 5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2021년 10월 6일에 두 번째로 아빠 품에 안겨 잠들었다고 감동의 기록을 남겨두기까지 했다). 물론 아이의 예민함에 주로 고통받는 것은 아내였다. 나는 첫째를 재우는 식으로 역할을 분담하긴 했지만, 무조건 안아야만 재울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곁에서 할 수 있는거라곤 하소연 하는 아내에게 아이의 예민함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 예민한 만큼 성취해 낼 수 있음을 – 설명해 줄 따름이었다 (참고글 : 아이를 대할 때마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
하지만 재우기와의 오랜 사투 이후 아이의 예민함은 시시때때로, 또 다른 문제로 계속 불거져 나왔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 앞에 앉기만 해도 까무러칠 정도로 울어댔다. 약을 먹이는 것은 물론이고, 폐렴이 우려될 정도로 콧물이 그득한 상태에서 흡입기를 쓸 때도 진이 빠질 정도로 우는 통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든 달래 가면서 고비 고비마다 잘 넘어갔지만, 예민함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변비를 앓기 시작했는데, 간혹 용변을 보면 똥이 단단히 뭉쳐있어 관장을 해 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힘을 주는 표정을 보니 변을 내보내기 위한 표정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을 내보내기 위해 힘을 줄 때는 보통 양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데, 아이는 오히려 살짝 내려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에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은 같았지만, 그 차이를 발견하고는 변이 안나오는게 아니라 참는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생각이 맞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이 부분은 우리 부주의와도 관련이 있는데, 어쩌다가 아이가 똥을 싼 상태에서 바로 처리를 못해줘 늦게 씻어주면 가끔 따갑다고 아파하곤 했다. 아픈 것에 대한 예민함이 컸던 아이는 그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똥을 참게된 게 아니었을까? 물론 한껏 참았다 겨우 내보내다 보니 항문이 아팠던 것도 한 몫을 했을 것 같기도 하다. 말 그대로 악순환의 연속인 셈이다.
3. 아이는 왜 이렇게 예민한 걸까?
그럼에도 이런 문제들을 경험하면서 늘 떠올랐던 생각은 그저 ‘아이가 첫째와 달리 엄청 예민하다’는 것 정도였다.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이 이렇게 다르구나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기질이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체감하는 정도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무언가 ‘다른 맥락이 있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이 갈수록 커져갔다. 단순히 날 때부터 예민했다는 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괴리감이 나도 모르게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가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둘째는 첫째와 특별히 다르게 양육하지 않았다. 오히려 첫째 때는 아내가 11개월 휴직 후 바로 복직했기 때문에 새벽에 출근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 때문에 깨어났을 때 엄마가 없는 것을 안 아이의 슬픔을 기록해 둔 적도 있었다. (참고글 : [14개월] 아이의 첫 애도) 둘째보다 분리불안이 더 클 여지마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는 더 이상 일과 병행할 수 없게 된 아내가 퇴사하면서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첫째 때보다 오히려 훨씬 안정적인 양육 환경이 마련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힘들어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처럼, 언제나 문제를 부여잡고 씨름하다 보면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의 순간이 이 문제에도 찾아왔다. ’아이가 왜 이렇게 예민한건지‘에 대해 궁금해 하며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아이가 입원했을 당시의 고통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 관점에서야 고작 이틀에 불과한 ‘해프닝’이었지만, 따뜻한 엄마 품에서 처음 떨어져 나와 보낸 이틀 밤은 아이에게 영원에 가까운 고통이지 않았을까. 어른들이야 이유를 알고 기한을 아니 (예상할 수 있으니)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아는 거라곤 엄마 목소리 밖에 없었던 아이가 새하얀 병실에서 홀로 누워있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7년 전 첫째가 갓 태어났을 때의 영상을 보면, 울고 있던 상태에서 엄마가 태명을 불러주자 신기하게도 곧장 알아듣고는 한결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아내가 신생아실에 첫 면회를 갔을 때, 엄마와 떨어진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벌어졌던 일이다. 하지만 둘째는 무려 이틀 동안이나 자기를 불러주는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
엄마 목소리를 알아듣는 듯 보였던 첫째
4. 예민함과 이른 언어 발달의 상관관계
이렇게 아이의 고통이 절절하게 다가와 너무나도 미안했던, 그리고 예민함에 대한 인과의 퍼즐이 맞춰졌던 건 올해 1월 24일 (21개월) 의 일이다 (이런 육아일기는 언제나 숙성이 맛인 듯 하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원인을 깨닫게 되면서, 그 생각은 ‘아이의 입원이 언어의 빠른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가설로 확장되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살짝 어이없어 했지만 내 설명은 이랬다 (당시에는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글을 쓰면서 보다 정교화시켜 보았다).
고통의 강도만큼 사람이 성장한다는 건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고통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언어 발달을 이끌었던 걸까?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이가 주변 사람들 (주로 가족) 의 대화를 잘 관찰하고 기억한 뒤 비슷한 상황에서 그런 표현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뜻이다. 자극과 기억, 인식과 표현의 연쇄작용인 것이다. 이 때 ‘관찰한다’는 것은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상을 유심히 (민감하게) 살펴본다는 뜻일텐데 아이는 왜 그런 관심을 일찍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이 지점에서 아이의 입원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이 입장에서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고통스러운 자극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모든 관심은 자극을 주는 대상을 향하게 된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대상이 또 나에게 어떤 아픔을 줄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아이의 경험이란 10개월 동안 함께 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어떤 위로도 없는) 곳에서, 수시로 낯선 손길이 나타나 바늘을 꽂거나 삽관을 하는 등 몸을 아프게 하는 공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울음 외에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아이의 공포심이 배가됐으리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즉 실재는 압도적인 감정을 이끌어 내는 만큼 이를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증상이 필요하게 된다. 아이의 ‘예민함’이라는 것은 결국 홀로 버려져 마치 영겁과도 같았을 당시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아이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던 것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둘째는 지금까지 충분한 애착 기간 (위로의 시간) 을 거치면서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엄마가 없어도 어디 갔냐고만 물을 뿐 불안해 하지 않을 만큼 한결 성숙한 아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언니를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절대 그냥 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지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둘을 떼어놓느라 곤욕을 치르긴 하지만. 비록 아이의 예민함은 여전히 상처의 흔적으로 남아 우리와 동행하고 있지만, 아이 특유의 사랑스러움과 생기발랄함이 이제는 우리 부부를 위로하면서 함께 감당해 나가는 중이다. 안정된 예민함이 삶의 중요한 자원이 될거란 믿음과 함께 말이다.
글을 쓰는 중에 잠에서 깨어난 둘째가 열린 방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배시시 웃는다. 잘 자라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아이에 대한 기록을하고 그것을 통해 통찰을 얻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어요!
태극님 안녕하세요! 꾸준히 읽어주시고 의견도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