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새벽 근무로 어김없이 찾아온 아이와의 주말 데이트, 오늘은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있어 함께 예식장에 방문하게 되었다.
1. 아빠를 시험하는 아이
무사히 (?) 예식과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카시트에 태워주려고 하자 아빠 손을 뿌리치고는 기어이 내려왔다 혼자서 다시 올라간다. ‘그래, 카시트에 얌전히 앉아주기만 한다면야 뭐’ 그렇게 기대하며 응원했지만, 이번에는 카시트에 올라가기가 무섭게 옆으로 내려가 뒷자석에 대자로 앉아 버렸다.
아내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어떻게든 태워야 출발할 수 있어 살짝 난감했다. 억지로 앉히려고 하면 자지러지게 울 게 뻔하고, (요즘 들어 자기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짜증을 부리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는, 아이와 함께하면 늘상 벌어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기분좋게 앉아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를 어떻게 움직이게 할지 고민하다가, 결혼식장에 가면서 아이에게 놀이터에 가자고 약속했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짐짓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안전벨트를 안하면 아빠가 출발을 못해서 놀이터에 못 가는데 어떡하지?”
라고 고민을 털어놓듯 아이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마치 언제 안간다고 했냐는 듯 곧바로 카시트에 올라가 앉더니 얌전히 아빠의 처분 (안전벨트 매기) 을 기다리는게 아닌가? 우리 아이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나 의아한 마음이 들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인상적으로 와 닿아 한 번쯤 되짚어보고 싶었다.
2. 텅 빈 메시지의 담백한 설득 효과
카시트에 앉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던 아이를 움직이도록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아이가 놀이터 가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놀이터에 가는 것을 좋아했으니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평소와 달리 망설임 없이 행동한 부분에서는 무언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이어서 떠올랐던 것은, 선택을 아이의 몫으로 돌렸던 담백한 메시지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행동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지 않으면 ~ 못하게 할거야.” 식의 부정적인 조건을 빌미로 설득(?)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하지 않아서 ~ 못해.” 라는 식으로 주체에게 책임을 부과했던 것이 의미있게 가 닿았다는 뜻이다. 첫 번째 문장의 예를 들어 보면, “네가 이걸 하지 않아서 나도 이걸 해주지 않을거야.”는 메시지는 일종의 ‘협박’으로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빼기’의 메시지가 이중으로 가해진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하기 싫은데 처벌에 대한 염려까지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을 쉽게 알긴 어렵다보니 막연한 부채감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묘한 반발심과 더불어 이런 대화가 지속될 경우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반면에 당사자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설득에서는 이러한 처벌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설득 당하는 ‘주체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 원하는 것만 못하게 될 따름’인 것이다. 즉, ‘텅 빈 메시지’ – 주체가 행위함으로 인해 외부로부터 받는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행위하지 않음으로 인해 처벌이 있는 것도 아닌, 의도 자체가 비워져 있는 메시지 – 는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준다. ‘내가 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담백하고도 순수한 자기 반성이 일어날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사실 별 것 아닌 것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 것일수도 있지만, 얼마 전 떠올랐던 ‘올바른 책임 의식이 성장을 추동한다’는 깨달음과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