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아이가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은 치츠파페 (키즈카페) 이다. 낮잠을 제 때 못자 하품을 계속하고, 심지어 밥을 먹다 졸아도 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던 터라 저녁을 먹고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방문하게 되었다. 잠깐 곁 길로 새서 아무래도 아이 때문에 여러 곳의 키즈카페를 다니게 되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많은 키즈카페들의 컨텐츠가 대동소이 하다는 점 (방방, 자석낚시, 피톤치드 놀이방은 대부분의 공통 요소이다) 인데, 운영하는 분들 저마다의 독특한 키즈카페가 많이 생겨나길 바래본다. 어쨌거나 오늘 간 곳은 카페 이름처럼 (헬로방방) 방방에 좀 더 특화된 곳인데 수영장 레일처럼 긴 방방이 두 줄로 늘어서 있는데다가 끝 부분은 높이도 달라 아이들이 달리기를 하듯 점프를 하며 재미있게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방방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달려가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뛰놀고 있었는데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엄마 아빠가 함께 방방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방방 특유의 흔들림에 익숙지 못한듯 몇 걸음 못 가 넘어지는 등 점프는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아이 부모의 눈에 곳곳을 누비며 자유롭게 노는 우리 아이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던지 어떻게 저렇게 잘탈 수 있는지,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 같다며 감탄사를 연발해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1. 성장할 수 밖에 없는 환경
우리 아이는 상대적으로 잘탈 수 밖에 없는 조건 속에 있었다. 물려받은 방방이 거실 한켠에 늘 자리잡고 있어 아빠를 꽤나 괴롭게 했고, (초반에는 한 시간 넘게 태워준 적도 있었다) 심지어 교회 놀이방에도 있어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 스스로도 타는 것을 좋아하니 실력이 나아지는 건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칭찬받는 것에 기분이 좋을 수는 있어도 그 외의 감정들에 빠질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2. 그런데 이런 아이를 만든 것은 누구일까?
상대적 우열의 늪 – 남보다 나으면 우월감을, 못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 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나라의 현실, 나 또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서 다시 한 번 자문해 보았다. 1차적으로는 당연히 부모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부모일까? 아이의 경우만 보더라도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최대한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을 뿐 그 모든 성취는 오롯이 아이의 것이었다. 우리의 의도대로 아이를 이끈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의 성장에 다만 감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우리 아이만의 특별함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호기심으로 대표되는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은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된 것으로, 하나의 이미 완성된 질서로써 우리가 만든 것도, 만들수도 없는 말 그대로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우리가 기여하는 정도는 과연 얼마나 될까? 밥을 때 맞춰 주고, 필요로 하는 것과 사랑을 듬뿍 주는 것 외에 우리가 기여하는 바는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전부라고 한다면 나머지의 영역은 결국 신의 범주로 넘겨야 하지 않을까. 입 속으로 들어간 음식이 영양분이 되어 아이를 육체적으로 성장시키는 원리와 반복된 경험을 통해 동물의 수준을 넘어서는 사유 체계를 갖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영원한 미지의 욕망 등 우리가 아이에게 제공하는 수준에 비해 그것이 성장을 위해 처리되는 원리는 완벽한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대답 외에는 다른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3. 가장 작은 것에 대한 고백
방방을 잘 타는 건 사실 정말 별 것 아니다. 하지만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이해될 수 없는 환자들의 증상, 헛소리) 속에 심리적 구조의 핵심 (주체의 진리) 이 들어있음을 간파한 프로이트로 인해 당시의 과학, 이성 중심의 사회가 완벽하게 놓치고 있던 인간 내면의 질서에 대한 언어적 해석의 길이 열릴 수 있었던 것처럼, 아이의 작은 진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성장의 기회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의도되지 않은 순수함으로 아이를 대할 때 원석인 아이는 내면의 보석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이자 내려놓는 만큼 부하게 하시는 역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성장하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갖는 의미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이미지 출처 : BHPA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