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개월]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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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잡는 첫째

1. 어린이집에서 바라보는 우리 아이

며칠 전 아내가 어린이집에 상담을 다녀왔다. 정기적으로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듣고 의견을 나누는 건데 살짝 염려가 됐다. 아직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게 서투르다보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갖고 놀던 장난감을 바닥에 던지거나 편한 어른들 또는 친구들을 때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특히 아내는 느닷없이 참 많이도 맞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를 겁주거나 크게 혼내지 않고 아이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아픔을 줄 수 있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타일러줘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 어쨌거나 요즘들어 어린이집으로부터 그런 문제 행동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던 건 한편으로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전해들은 상담 내용 중 특별히 와 닿았던 부분은 없었다. 아이가 상담이 필요없을 만큼 잘 지내고 있고,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이 크고 정리도 잘해 앞으로 공부도 잘할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셨다는게 내용의 전부였다. 다만 아이가 정리를 잘한다는 부분에서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벌써부터 정리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놀게 되면 마음껏 놀기 어렵기 때문에) 집에서 요구를 자주 받아 나오게 된 행동은 아니었기에 스스로 선택한 성향이라 여기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또한 공부도 평소 자신이 원하는 길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 누구든 알아서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2. 만족의 기준은 어떻게 높아지게 됐을까?

아마 여기까지만으로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면 글로 남기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귀를 사로잡는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아내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은 모양이었던지 갑자기 생각난 듯 나중에 이야기해 준 건데, 개인적으로 아주 의미있게 다가왔다. 친구가 실수로 아이를 밀쳐서 넘어지는 경우 대개 울게 되는데, 이 때 선생님이 그저 ‘달래주기만’ 해서는 울음을 잘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잘못한 친구를 데리고 와서 사과를 하도록 하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줘야 울음을 그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고집이 있다? 자기 주장이 강하다? 유난스럽다?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아마 아내의 경우도 그런 생각 때문에 마냥 긍정적으로 여기긴 어려웠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건 아이의 만족의 기준이 높다는 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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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입어줘야 패션의 완성

적당히 달래줄 때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노는 것도 얼마든 가능할텐데 울음을 멈추지 않음으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은 어디에서 왔을까?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아이가 똑똑하다고 여기고 넘어갈수도 있겠지만, 아이를 키워 온 부모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이 내면에 형성된 하나의 습관이자 중간 결과였다. 그 중심에는 가정 환경의 어려움 또는 부모의 무지로 인해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저지르게 되는 아이를 향한 폭력을 가정에서 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 말이다. 마음에 상처를 받고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심지어 멈추지 않도록, 하지만 삶에서 배우고 고쳐나가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은 그저 반복적으로 설명해주는 것 뿐이었다. 아이를 대할 때면 언젠가 책에서 접해 머릿속에 각인된 ‘친절한 엄격함’이라는 표현이 매번 떠올랐다. 아이에게 강요적이지 않게 전달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형성한 정신분석 상담 이론과 임상 사례, 경험들, 또한 기독교의 은총인 사랑 등 이 모두가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어 확신을 갖고 일관되게 아이를 기다림으로 대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글들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 또한 ‘감사함’ 때문이었고 말이다. (그 내용은 이전 글 진정한 회복탄력성은 지지기반을 통해 완성된다 을 통해 전한 바 있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구해주었다는 구원의 표식, 곧 은혜의 고백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즘 들어 인지적 감사의 중요성 – 감사하는 삶의 태도가 다른 어떤 방법보다 마음을 다스리는데 가장 효과적이니 감사를 습관화하라 – 이 (제한된) 과학적 연구들에 의해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더 나아갔으면 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받아야 할 조건마저도 자가 생성해야 하는 척박한 정서적 토양이 아니라 (물론 당장은 그렇게 해서라도 변화를 이끌어야겠지만), 자연스럽게 생성된 감사의 물줄기가 마찬가지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흐르게 되는 구조를 세우는데 초점을 맞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선두에 나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위치해야 함이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하늘의 천국을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사랑의 은혜에 감동받아’ 부름받은 자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한국 교회에 분노하는 것, 실상은 그 사랑의 진리가 온전히 회복되길 바라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척박한 이 땅이 감사함이 넘치는 곳이 되도록, 교회가 그 첫 마음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과 더불어 나부터 그 토대를 쌓아 올리기 위해 준비를 이어갈 것을 다짐해 본다.

3. 다시 아이에게로 돌아가서

얘기가 많이 길어졌지만 아이가 만족의 기준이 높다는 것, 즉 자신의 상한 마음이 어떻게 해야 풀리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협이란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의 접점을 찾는 것일텐데, 내 입장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맺게 된 타협은 손해를 봤다는 생각과 함께 직 · 간접적으로 다른 보상을 요구하도록 이끌게 마련이다. 불평등의 강도가 강할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과 이를 억누르기 위한 작업, 곧 증상이 형성될 수 있는 위험마저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소크라테스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를 잘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이 받아들여야만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아이의 모습은 욕망의 그릇을 잘 키워놨다는, 즉 자존감으로 연결되는 내면의 토대가 잘 다져졌다는 신호로 읽혀졌다. 한 번 형성된 눈높이가 높아질 순 있어도 낮아지긴 어려운 것처럼, 한껏 높아진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이는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도전해 나갈 것이고 엄마와 아빠는 이를 한결 같이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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