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개월] 엄마, 아빠의 친밀감이 아이에게 중요한 이유

readelight

엄마와 자녀들

저녁을 먹기 위해 세 가족이 식탁에 앉아있을 때였다. 아내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오늘 아이를 데려오면서 선생님께 들었던 내용을 전해주었다. 근래들어 부정적이거나 염려가 되는 내용들을 들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첫 마디를 듣자마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아이가 아침에 혼났느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오전 내내 기분이 안좋고 활동적이지 않았다고 하셨단다. 거기에 아내는 혼나기는 했는데라며 말 끝을 흐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침의 상황을 모두 지켜본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아이는 전혀 혼나지 않았다. 시리얼을 먹으면서 우유를 많이 남겨 핀잔을 듣긴 했지만 억지로 먹게 하거나 화를 내거나 해서 아이가 눈치를 보거나 우는 등 분위기 자체가 험악(?)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품에 안겨 별 다른 일 없이 편하게 등원 했었기에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 선생님 품에 안겨 드리고 인사하고 나올 때 표정이 안 좋은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기분 탓이 아니라 이미 그 때부터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가 있었나? 그 짧은 순간에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기억을 더듬던 중, 이어지는 아내의 이야기에 긴장이 풀리며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나만 떼놓고 엄마 아빠 같이 놀러가구…….”

그제서야 아이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선생님이 들으셨던 모양인데,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아내가 나를 정류장에 태워주려고 같이 나왔던 것이 화근이었다. 벌써 1년 넘게 다니는 어린이집이었지만 엄마 또는 할머니, 드물게 아빠 혼자 바래다 주었던 것에서 엄마와 아빠가 함께 바래다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은 차를 빼러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고 엄마, 아빠가 함께 서서 배웅을 해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서운했을까. 얼마나 기분이 언짢았으면 오전 내내 그렇게 시무룩해 있었을까 한편으로 딱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좋은 의미에서의 좌절을 경험했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엄마와 아빠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으려면 평소에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좋았다는 경험과 믿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아이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준 것이 고마웠고, 엄마와 아빠가 아이가 아니라 서로를 우선시한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 또 고마웠다. 대개 아이의 문제는 부모 어느 한 쪽의 정서적 불균형으로 인해 아이를 자신의 욕망에 종속시키고자 할 때 벌어진다. 물론 어떤 경우에라도 아이는 부모의 욕망에 종속될 수 밖에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의 욕망이 충분히 뻗어나갈 수 있도록 열어주는 ‘틈’일 것이다. 그 공간을 얼마나 넉넉하게 열어주느냐, 즉 아직은 무분별해 견디기 어려운 아이의 충동을 얼마나 받아줄 수 있느냐는 부모의 이해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두 사람이 얼마나 편안한가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물론 잘 지키지는 못하지만..;) 아이에게는 못내 슬픈 경험이었겠지만, 우리 부부가 그래도 평소에 서로를 존중하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건강한 대상관계를 향한 내면의 토대가 잘 닦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한 마음이 들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라는 인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어떻게 받아들이는가]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의 말(parole), 정확히 말하면 그의 권위,달리 말하면 법의 출현에서 그녀[어머니]가 아버지 이름을 위해 유보해 놓은 자리를 얼마나 존중하는가라는 것이다. – J. Lacan,『정신병의 가능한 모든 치료에 대한 예비적 문제에 관하여』, in Écrits, op. cit.,p.579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 p. 162 에서 재인용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아이와 가장 밀접한 관계, 달리 말해 ‘융합’되어 있는 어머니를 심리적으로 분리시켜 아이의 주체성이 출현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버지, 더 정확하게는 그 아버지를 존중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결정적이다. 아이와 한 몸이 되어 아버지의 존재를 ‘배척’하는 경우, 아이는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상 속에 머무는 정신병 환자가 되고 만다.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를 무시하는 어머니의 아이는 장차 강박증[1]을 겪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먼저 아내로 하여금 존경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 아버지의 책임이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다만 필자가 특별히 잘나서라기 보다는 언제나 성장에 목말라 분발하고 있는 모습을 가엾게 여기는 (?)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강박증적 성향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만만찮게 안정된 내면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의 아내같은 사람이 말이다.


[1] 강박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필자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한국 사회가 강박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 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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