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개월] 아이의 사과가 의미있게 다가왔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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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그동안 아이와의 이벤트가 없었던 게 아닌데 책과 씨름하느라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경우처럼 아이는 끊임없이 나를 자극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최근 있었던 일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1. 장난이 아니게 된 장난

세 가족이 함께 차에 탔을 때의 일이다. 보통은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면서 안전벨트를 바로 매주는데 급하다보니 카시트에 앉히기만 하고 운전석에 앉아 아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앉은 자리에서 아이의 몸 뒤쪽에 있는 어깨끈을 빼내긴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은 시들해졌지만 벨트를 매주려고 하면 자기가 하겠다고 건들지도 못하게 하던 때가 있었고, 대화의 수준도 많이 높아졌기에 도와달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그렇게 해주곤 했다.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요청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는 결코 한 번에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부모가 감동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두 어깨끈을 모아 바닥의 버클에 맞춰 끼우기만 하면 되는데 뭔가 잘 안되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하게는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맞추지 못하는 척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여유라는 것은 언제나 부모를 이렇게 시험한다. 시간이 넉넉하고 기분이 좋다면 그런 장난 쯤은 기분좋게 받아 줄 수 있었겠지만 자원은 늘 한정적이다. 물론 평소에도 급한 성격이긴 하지만 자세마저 불편한 상태에서 아빠의 인내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결국 양 손을 뻗어 아이 손에 쥐어져 있는 벨트를 다소 거칠게 빼앗아 끼워 맞추고 말았다. 장난이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된 아이는 서운했는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거기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채 바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연히 아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아이를 달래는 건 엄마의 몫이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뒤, 운전하는 내내 불편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벨트를 풀어주면서 말을 걸었다.

“아빠가 벨트 안맨다고 짜증내서 미안해.”

평소에 고맙다는 표현, 미안하다는 표현을 아끼는 편은 아니었기에 아이에게는 새롭게 와 닿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때문에 필자가 기대했던 대답은 ‘응’ 또는 ‘갠(괜)찮아’ 정도였던 듯 싶다. 하지만 돌아온 아이의 반응은 이런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벨트 안매고 장난쳐서 미안해.”

설마 자신이 잘못했던 부분을 인정하며 맞사과(?)를 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고백을 들은 엄마와 아빠는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지만 꼭 한 번쯤 곱씹어 볼만한 일이었다.

2. 사과할 마음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반복된 경험을 통해 아이도 부모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분명히 안다. 사실 그걸 좀 알면 부모가 좋아하는 행동들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지만, 대체로 그런 일들은 아이의 의지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싫어요’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듣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도 장난을 치고 싶을 때는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는 부분을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건드리며 자극을 준다. 그래야 재미, 다른 말로 스릴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이도 부모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일부러 장난을 치며, 하지만 그 선을 자주 넘어서면서 속을 끓이기 일쑤다. 앞선 상황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또는 힘들게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빠가 먼저 사과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자신이 갖고 있던 걸 거칠게 빼앗은 아빠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빠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기 쉬웠을 터였다. 사과를 받는 것이 당연한 ‘입장’이었을 것이라 예상했던 이유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뚫고 사과를 ‘해줬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건 그 때문이었다.

필자에게 있어서도 ‘사과’란 참 어렵다. 실수, 실패란 무능함과 동격이라는 강박 관념이 (많이 덜어내긴 했지만 여전히)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마음가짐이 적극적인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잘못을 하게 되면 그만큼 쉽게 죄책감에 휩싸이게 되고 상대방을 평소처럼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나마 내 책임이 좀 덜하다면 금방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헤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아이에게는 훨씬 쉽게 사과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이가 잘 받아줄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에게 사과하는 건 정반대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는 부모의 표상을 갖고 있다면 자신의 잘못을 좀처럼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가히 전능한 존재인 부모에게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공포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이를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낮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두려운 마음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넘어서면 드러내기를 주저하게 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두려움이 방해하지 못한다면 표현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아이를 대하는데 있어서 필자가 한 가지 염두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친절한 엄격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표현이 부족할 뿐 동등한 인격체임을 염두하는 것과 함께. 이러한 생각은 물건을 던지거나, 기분 나쁠 때 사람을 때리는 부분에 있어서는 지속적으로, 최근들어 조금 더 강한 어조로 경고 메시지를 주고 있지만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도록 이끌어 준다. 잘못되거나 안되는 것은 양보하지 않지만 반드시 때려서만, 혹은 심하게 겁을 줘서만 위축되는 것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 뿐이다.

민주주의는 철학의 원점에서는 필연이며, 철학의 종점에서는 난점이다.
알랭 바디우, 『투사를 위한 철학』, p. 57

자유로 예표되는 민주주의는 진리 출현을 위한 필수 조건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평등을 위한 철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어려움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 하지만 바디우는 이를 ‘자유의 낮’과 ‘철학의 밤’을 통해 시차적으로 해결한다.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 뒤 함께 사유함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친절한 엄격함의 교훈은 바로 이런 식으로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믿고 기다려주면, 또한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반복적으로 알려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거라는 믿음을 훌륭하게 뒷받침해주는 방법으로써 말이다. 아이는 분명 대하는 대로 큰다고 믿는다. 핸리 포드의 말처럼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하면 정말로 할 수 없을 것이고, 할 수 있다고 믿고 기다려주면 정말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사과가 이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LJC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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