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이 닿는 모든 것이 회색빛이다. 아닌가, 희미하게나마 저마다의 색이 감지됐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알 수 없는 길을 마치 끊어진 필름을 재생시키듯 겨우 겨우 따라가다 도착한 곳은 차갑고 허름한 단체 손님을 받는 식당 같은 곳이었다. 길게 늘어진 뷔페 상차림에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식당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왼쪽 방에서 걸어 나왔다. 5년 전 결혼할 때의 그 모습으로. 아, 설마 여기가 결혼식장인건가? 결혼한다고 하더니 이런 곳에서 하는 거였어? 예전에 얼핏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은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왜 온거지?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애써 덤덤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다가가 물었다.”내가 그렇게 싫었어? 미리 얘기해 주지 그랬어.””그런 건 아니야…….””그리고 할 거면 이혼을 하고 하던가 이게 뭐야. 아무리 내가 싫어도 지킬 건 지켜야지. 이런 식으로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아내는 말 없이 다른 방으로 갔고 그렇게 생생했던 꿈 이야기는 끝이 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뭘까? 왜 이렇게 선명하지? 무언가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당장은 떠오르지 않아 현실의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역시 귀신 같은 디테일. 아내는 웃으면서 왜 안된다고 붙잡지 않고 이혼하고 하라고 했냐며 나의 무의식에게 마저 핀잔을 준다. 얼떨결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결혼 무효야!”라고 할만큼 충동이 충만한 사람은 아니라며 얼버무리고 대화는 마무리 됐다. 그동안 꿔왔던 많은 꿈들처럼 이 꿈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겠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재택 근무를 하고 있는 요즘은 오히려 나가지 못하는게 답답한 상황이다. 그나마 출퇴근 시간이 사라진 덕분에 잠시나마 갖게 된 여유 시간을 함께 누리기 위해 집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 옆의 새장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뜬금없이. 그렇게 갑작스레 떠오른 감정은 곧바로 어제의 꿈을 소환시켰고, 그제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죄책감’으로 형성된 꿈의 실체를 말이다.
전날 잠들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사방으로 뒤척이던 아이가 선택한 자세는 내 머리 위로 발을 올리는 것이었다. 자기가 불편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표현이 서툴러 발로 차거나 할퀴는게 아직은 고쳐지지 않았는데, 내 머리도 같은 취급을 당하고 말았다. 평소 주의를 주기도, 엄하게 경고를 주기도 하지만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을 만큼 – 필자는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지만, 아내는 본래 성격이 좋아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듯 싶다 – 혼내는 식이다 보니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거침이 없다. 안그래도 기분도 썩 좋지 않았던 상태에서 그런 발길질까지 당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곧바로 양발을 붙잡아 아래 쪽으로 내던지듯 내려놓았지만 상체의 방향이 바뀐게 아니었기 때문에 발은 다시금 얼굴로 되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이성의 끈을 놓지지 않도록 불쾌한 감정을 가득 담아 경고 메시지를 던지며 몇 차례 더 옮겨 놓았다. 하지만 그 과정마저 장난으로 여겼던지 도무지 중단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는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발을 내동댕이 치면서 최후통첩을 날렸다.”너 한 번만 더 해봐.”일순간 침묵이 흐르고 머잖아 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나를 건너 엄마 곁으로 갔다. 이번에도 타이르는 것은 엄마 몫이었다. 결국 상황은 그렇게 종료됐고 꿈 재료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편안하게 앉아 있던 가운데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프로이트가 밝혀낸 꿈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방식은 수 천년간 지속돼 왔던 ‘꿈 사전’과 같은 1:1 매칭이 아닌, 전날 혹은 인상 깊었던 과거의 기억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암호문이라고 한다. 보통 무의식 속에 억압된 욕망은 그대로 드러날 경우 심리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자신의 충동을 그대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때문에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암호화 작업 (압축과 전치로 구성된) 을 해야만 한다. 마치 편지의 비밀스러운 내용을 간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환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비틀어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꿈 속에 드러난 대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것은 꿈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익숙한 표현 양식을 통해 감추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 그것이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남겨준 중요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의식적 소원이 꿈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꿈의 <자극>이 주로 또는 전적으로 낮 생활의 잔재에서 비롯되는 부류의 꿈들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꿈에 필요한 <원동력>은 어떤 소원에 제공한 것이 분명하다. 꿈의 원동력으로서 그러한 소원을 조달하는 것은 염려의 몫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p. 649
프로이트에게 있어 꿈은 ‘소원 성취’다. 다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본래 의도를 감춘채 교묘하게 꿈 속에서 표현된다. 그렇다면 이 꿈은 아내를 떠나보내기 위한 내 무의식적 소원이 성취된 것일까? 하지만 당시의 기억과 감정은 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잿빛 배경에 어지럼증에 걸린 듯 전혀 알 수 없었던 예식장 가는 길, 그리고 드러나지 않았던 우울함. 아내는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배역에 충실할 수 있었다. 실상은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잠들었던 것, 그리고 늘 고민하게 되는 언행의 불일치 – 잘 기다려주는 현명한 아빠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 에 대한 자괴감에 있었다. 이런 괴로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제의 나는 아이에게 사과하지 못한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내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아내의 떠남은 그 결과였다. 속죄받지 못한 가여운 영혼에게 주어지는 형벌은 ‘홀로 남겨지는 것’ 뿐이다. 꿈은 전적으로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아내가 떠난다는 설정은 그녀를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구제불능인 나를 버려두고 당신의 삶을 살라는 체념적 태도가 이끌어 낸 자기 처벌적 소원의 성취였다. 그렇게 꿈을 통해 드러난 것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징벌-꿈의 본질적인 특성은 억압된 것(무의식 조직)에서 유래하는 무의식적 소원이 아니라, 이 소원에 반발하고 무의식적(다시 말해 전의식적)이지만 자아에 속하는 징벌 소원이 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p. 647
겉으로는 많이 극복한 것 같고 아무렇지 않은 듯 하지만 내심은 사람들의 반응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나의 현재 모습이다. 인정받음을 통해서만 기준에 다다르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몸도 동시에 반응한다. 위에서 부터 소름이 아랫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는 성취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내면을 단단하게 세워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필자에게 있어서 숙명과도 같은 이러한 죄책감과의 싸움은 주위에서 경험하게 되는 아주 많은 것들을 매우 ‘피곤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무의식적으로 구축된 보상과 처벌의 양가적 삶의 구조는 매 순간을 평가이자 경쟁의 과정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들은 허투루 여겨선 안되며, 높은 기준치에 부합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계속해서 몰아 붙여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고통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애를 써도 흩어지는 정신을 붙들기 어려웠던 것이요,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는 것도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실수나 만족스럽지 못한 성과에 대해 외부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쓰게 되어 사람들을 만나는 것 또한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이 된다. 이를 여전히 느끼고 있는 것은 스스로에게 떳떳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태도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좁은 시야와 하염없이 한 우물만 파는 강박증적 삶의 태도는 그렇게 형성되었다. 물론 처벌은 비할데 없이 두려운 것이었지만, 보상의 달콤함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힘겹지만 다시금 나를 끌어내는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삶을 살아내도록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이 같은 성취의 경험이 느리게나마 나를 성장시켰고 또 회복시켜 주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형성된 삶의 근원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여전히 운동하고 있었다. 속죄제로써의 꿈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분명 스스로를 처벌하기 원하는 소원은 이루어졌다.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칫 억누를 수도 있었던 감정이 자기를 드러냈다는, 즉 감정을 해소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의식될 수 없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자기 처벌을 통해 죄씻음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은 내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는, 즉 내면이 그만큼 단단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죄책감을 충분히 가지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 운동하는 정신을 가진 주체로서 말이다. 물론 언제고 이 과정은 괴로움과 회복의 연속이겠지만, 반성의 과정이 끝날 때마다 분명 이전과는 다른 경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이가 삶 가운데서 반드시 획득했으면 하는 것 또한 좌절의 자리에, 고정된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꼭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반성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통해 아이의 내면도 단단하게 세워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boost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