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고민은 아무래도 아이를 설득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인 듯 싶다. 이제 머리도 커지고 선호도 분명해지면서 요구가 점점 더 까다로워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게 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부부도 아이를 잘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지만, 아이의 관심을 돌릴만한 대안이 늘 있는 건 아니다보니 내키진 않지만 결국 부정적인 방식으로 선택을 바꾸게 하곤 했다. 오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장을 보던 때였다. 유치원 친구들의 생일파티를 위해 선물을 고르다가 아이가 초콜릿을 먹고싶다고 해 손에 쥐어주었다. 속이 비어있는 긴 통에 작은 초콜릿들이 들어있는 장난감? 혹은 약간 불량식품 같은 제품이었다. 유치원에서는 어린이집에서처럼 낮잠을 재우지 않아 이 시간대만 되면 부쩍 피곤해하고 짜증도 많이 내 아내가 예방 차원에서 흔쾌히 허락해줬던 듯 싶다. 그렇게 즐길 대상이 생긴 아이는 쇼핑카트에 앉아 나름대로 피곤함을 달래고 있었고, 엄마는 선물을 고르고 아빠는 그런 두 사람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아내에게 관심을 돌린 사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촤아~!”
시원한 소리에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니 이미 아이 손에는 빈 통만 남겨져 있고 초콜릿은 사방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이의 초콜릿 통은 끝 부분을 뚜껑으로 닫아놓는 식이었는데, 그리 단단히 고정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물론 아이는 그런 점을 잘 몰랐기 때문에 막대기를 휘두르듯 아래 위로 몇 차례 흔들다가 우리가 말리곤 했었지만, 어차피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사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쏟진 않겠지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뚜껑이 위로가도록 하고 잘 들고만 있어도 됐을텐데 역시 이런 단순한 노하우도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아내의 반응이었다.
“아이고 어떡해~ 거봐 엄마 말 안들으니까 그렇잖아.”
사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갔을 법한 반응이었는데 오늘은 아내의 그런 반응이 조금 더 특별하게 와닿았다. 어쩌면 아이가 이번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새롭게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마트에 비치된 빗자루를 찾아와 쓸어 담으며 떠나지 않는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아픔을 통해 아이가 배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엄빠의 염려를 무시한채 멋대로 하다 결국 당시에 가장 소중히 여기던 초콜릿을 다 쏟게 된 아이. 역시 여기에서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러니까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라는, 부모 입장에서 ‘나를 좀 더 편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메시지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내의 반응도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앞으로 아이가 취하게 될 행동은? 이런 교훈이 정말로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오히려 의존성 (선택을 주저하고 누군가의 결정을 바라는) 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하게 되진 않을까? 어쩌면 내가 별 것 아닌 일에 너무 예민하게 몰두하는 걸까? 하지만 이러한 (충분히 의식되지 못한) 반응이 반복적으로 아이의 의식에 누적된다면, 그 때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얘가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더욱 심각한 고민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다른 것보다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서도 얻는 답이 그저 ‘역시 부모님 말씀은 잘 들어야해’ 정도로 끝나게 된다는게 못내 아쉬웠다. 누굴 탓할 것도 없이 엄마 아빠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못해 벌어진 일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분명 흔치 않은 일이었고, (행동이 겹쳐서 문제가 생기게 되면 무조건 상대 탓을 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아이는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채 그저 울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오늘날은 예전과 달리 실험 정신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많이 퍼져 있는 듯 싶다. ‘실수를 통해 배우기’라고 하는 이러한 방식은 나의 모든 경험을 의미있게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 과정이다. IT 업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 일하는 방식도 점차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느끼고 있고, 결국 관련해서 파생된 애자일이니 스프린트니 MVP니 하는 것들도 결국 해보고 싶은게 있으면 빠르게 시도해서 그 결과를 확인해 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성공 자체보다는 (물론 이를 지향하긴 하지만) 결과에 대한 ‘원인 분석’ 이었다. 아이는 분명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끼는 초콜릿을 모두 잃게 되는 대참사를 경험했다. 어른들이 보기엔 단순히 바보같아 보이는 짓일 수 있으나, 아이가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이 상황이 된건지, 그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은지를 물어본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라야지’가 아닌 ‘그러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나의 귀한 경험을 반추하고 작지만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보고 시도해볼 수 있는 것, 달리 말해 오늘의 경험이 성장의 자양분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필자도 그렇지만, 성장을 향한 목마름이 있지만 이를 어떻게 발전시켜야할지 몰라 괴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사고 방식을 그대로 답습시키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소중한 이런 경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앞선 책에서 지젝이 이야기한 기독교적 해법 그 자체이지 않을까. 다른 대상에게 잘못을 덮어 씌우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사람이 잘못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떠한 환상적 보충에 기대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해결 방법을 찾아내고자 시도하는 것 말이다.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습관들이 결코 한 번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가 기저귀를 뗄 때도, 남을 때릴 때나, 잠자리를 옮기는 지금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결코 한 번에 완성되는 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의 행동을 섣불리 교정시키려는 (지젝이 뉴에이지식 인지치료적 반응이라고 비판한)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를 자극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 뿐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훈육이란 결국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만의 길을 찾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과 아이를 대하는 방식도 계속해서 변화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믿음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아내도 이에 기꺼이 공감해 주었다. 포기하지 않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은 단순히 칭찬만으로, 또는 강제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닌,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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