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을 다니던 기간 동안(3~4살)[1] 가장 고민이 됐던 것은 아이가 ‘잘 때린다는 점’이었다. 그 시기 아이들이 그렇듯 무언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좌절’을 해결하고자 하는 나름의 (투박하지만 순수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어려웠던 것은 그때가 언제 닥칠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비록 밤톨만 한 손바닥이지만 갑작스레 얼굴을 강타하면 순간적으로 별이 번쩍인다. 아픈 건 둘째치고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 표정을 살피며 미리 피할 준비를 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도 엄마나 아빠에게만 그렇게 하면 괜찮을 텐데 가끔씩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한다는 점이 아내의 마음을 가장 어렵게 했다. 어른들은 그나마 이해해줄 수 있겠지만 친구들을 그렇게 때리게 되면 문제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린이집을 다니는 동안 두어 차례 장난감을 던진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은 있어도 특별히 친구나 선생님을 때렸다는 얘기가 들려오지 않았던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대할 때 몇 가지 기준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이가 아직은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어려움을 끼칠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과, 깨달음이란 철저히 경험적이고 사후적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아직 전능감이 충만한 시기 (정신분석에서는 아주 어린 시기에 아이가 이 느낌에 푹 빠져있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한다) 이기에 그 기쁨을 함부로 빼앗지 않으면서도 아이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시점에 그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반복해서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어려움 (기저귀 떼기) 이 지나가면 새롭게 등장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계속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인내의 과정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 문제의 경우, 초기에는 주로 표정과 말투로 아이에게 맞은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후 아이의 의사소통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설명을 통해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좀 더 분명히 알게끔 진화되어 갔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가 전혀 모를 때의 표정, 행동과 알 때의 그것이 분명히 달랐기 때문에 반응 방식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진정한 어려움은 아이가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찾아왔다. 이때부터 모른다고 가정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인내심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향한 기대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은 동일한 행동을 참기 어렵게 만들었고, 한편으로 그 덕분에 아내에게 종종 실수할 때의 내 모습을 다시금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면 실망도, 그에 따른 분노도 분명 없었을 것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결국 이 시기부터 이전 글처럼 반성하는 날도 덩달아 늘어나게 됐다. 또한 아이가 알면서도 문제가 되는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징계(?)의 수준도 달라졌다. 엄마는 종종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잘못에 대해 분명히 인지할 수 있도록 경고를 주었고, 아이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과정들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때리기, 꼬집기, 던지기, 노려보기 등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중 자신의 의사가 좀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을 계속해서 찾아나갔다. 아무래도 때리는 것에 대한 반응의 민감도가 가장 높았기에 점차 이런 표현을 다스려 내면화시키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어린이집 마지막 날 원장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장난감을 곧잘 던지고 하더니 요즘에는 그러지 않고 언어로 표현을 잘한다고 말씀해 주셔서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뿐 아니라 아이를 잘 받아주신 좋은 선생님들 덕분에 어린이집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최근 읽었던 책 『개인』의 핵심 내용이 계속해서 마음에 머물렀던 것은, 타율이 아닌 자율성의 주체의 탄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인류의 역사 자체가 잘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체 개념에 있어서 1700년대까지를 의무에 종속된 ‘고대’로 바라본 저자의 구분은 인간에게 있어 깨달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명확히 각인시켜 주었다. 종교도, 정신분석도, 철학도, 그리고 다양한 자기계발 서적들 그리고 일반이 인식하는 것 모두는 결국 개개인이 진정으로 ‘주체적인 삶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한)’을 사는 것에 있다. 주체를 향한 삶의 밑그림을 그리는 시기가 영유아 때부터임을 생각했을 때, 이번 책 읽기는 성장을 위한 기다림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인격체로서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민주주의는 사회뿐 아니라 가정에도 도입되어야 할 삶의 방식일 것이다. 저자인 알랭 르노가 이야기하듯 민주적 토대 위에서만 개인성(독립성)은 그 꽃을 피울 수 있고, 구성원들 간의 합리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이타성을 자율적으로 내면화한 아이는 다가올 시기를 향해 선명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 살기를 갈망하는 아빠를 바라보면서 아이 또한 자기만의 삶을 단단히 세워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기다림의 이유에 힘을 더해준 이번 책이 새삼 고마운 이유였다.
[1] 2018년 9월 5일 ~ 2020년 2월 21일 (기록을 위해 남겨 놓고 싶었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https://www.gofundme.com/f/r9cnm-trying-to-keep-a-family-tog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