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드디어 아이의 침대가 도착했다. 처음 가족 침대를 살 때 작은 사이즈를 아이 방에 놔주려고 했었지만, 방 크기가 너무 작다보니 새로 장만하게 된 것이다. 매트리스는 따로 주문해서 아직 침대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황이었는데, 잘 시간이 되자 아이는 갑자기 그 위로 올라가 여기서 자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 했다. 아내가 아직 침대 바닥에 깔게 없어서 매트리스가 오면 자자고 만류했지만, 듣는둥 마는둥 곧 자기 이불을 들고 오더니 씨익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렇게까지 하니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이불을 깔아주고는 혹시 몰라 문을 살짝 열고 나왔는데, 갑자기 제 발로 문을 닫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 모습이 엄마와 아빠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는데, 비록 ‘이제 유치원 다니는 언니니까 혼자 자야한다’고 예고를 해오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부침을 겪을 것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잘 때까지 옆에 있어 달라거나, 책을 읽어달라거나, 자다가 눈을 비비며 안방으로 들어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내도 침대를 들여오면서 계속 “혼자 자려고 할까?”라며 염려를 했지만, 아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씩씩하게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글을 쓰라고 재촉한 아이 덕분에 어제의 일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혼자 잘 수 있다는 것의 의미
혼자 어두운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겁이 없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아이가 매사에 자신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무서움을 타는 것들도 은근히 많다. 예를 들어 도깨비 전화 앱을 켜면 신호음만 들어도 질색을 한다. 단순히 싫어하는게 아니라 무서워 하는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물론 역효과를 우려해 거의 하지는 않고, 또 도깨비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도 않는다). 그렇게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또 자기가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도움 요청도 빨라 아리송한 일이었다.
우리는 정상적 공생기간 동안, 자기애적으로 융합된 대상은 ‘좋은 것’으로 느껴지며, 따라서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성격을 띠는 일차적 동일시가 나타나는 것을 관찰한 바 있다. 이때 보다 급격하게 분리에 대한 정신내적 자각이 나타나거나, 부모가 침범적이거나 예측 불가능할 경우, 조절하고 협상하는 자아의 기능이 덜 발달하게 된다. 즉 외부세계에서 애정대상의 정서적 태도가 예측이 불가능하여 믿을 만하지 못하거나 침범적일수록, 대상은 동화되지 못한 이질체 – 정신내적 정서관계 안에 위치하는 ‘나쁜’ 내사물 – 로 남아있게 된다(Heimann, 1966). 이러한 ‘나쁜’ 내사물을 추방하기 위한 노력으로 공격적 욕동의 파생물들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마가렛 말러, 프렛 파인, 애니 버그만, 『유아의 심리적 탄생』, pp. 180 – 181
일반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특히 정신분석의 연구들은 부모와의 정신적 분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만 그 분리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본문의 경우처럼 불안정한 부모의 태도는 아이에게도 동일한 불안을 형성하게 할 위험이 있다. 분리불안, 즉 부모와의 분리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아이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이 크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부모를 통해 학습했음을 의미한다. 부모 자체가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의 부모의 외상적 금지, 예를 들어 다른 행동을 이끌기 위해 공포심을 자극한다거나, 크게 화를 내거나 체벌을 가하는 등 부모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의 자극으로 아이를 위축시키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아이는 자기 표현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부모는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모르다보니 자칫 간과될 수 있는 이러한 인식의 간격은 아이의 불안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될 듯 싶다. 이처럼 부모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두려운 상황을 안심시켜주는 부모의 이미지가 아직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 (대상 신뢰를 형성하지 못함) 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지젝의 앞선 글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의 문제) 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 즉 실재의 무자비한 제거인 인지치료적 행동 교정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필자의 글을 이전부터 보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때문에 아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허용하고 (다만 수용할 수 없는 위험한 행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제지하고 충분히 설명을 해주어 감정에 잔여물이 남지 않도록) 직접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데 많은 관심을 쏟아 왔다. 이러한 선택에 확신을 갖게 해 주었던 것들은 블로그를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책들 곳곳에 담겨 있었다.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는 진리란 ‘객관적’인 것이 아닌 ‘주관적’인 것이라는 인식으로 (주체가 사건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만 그 사건은 진리가 될 수 있음) 전환되었다. 부모가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해주려고 하면 할수록 아이에게 진리의 사건이 될만한 우연적 기회는 점점 더 차단되어 자신만의 주관성을 펼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줄어드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그 상황이 악화될 경우, 어머니의 욕망에 종속된 아들은 모든 것이 의무가 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박증적 경향에 몰두하게 되고, 여성의 경우에는 히스테리적 증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게 됨을 알게 해준 것이 프로이트에서 출발한 정신분석의 교훈이었다.
다음날 유치원에 바래다 주면서 혼자 자니 어땠냐고 물어보니 신나고 재미있었다고 태연히 대답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빠도 갖지 못한 용기를 가진 모습에, 두려움의 유령을 아이에게 심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이가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의 강도는 비례해서 커지게 마련일 것이다. 그런 어려움들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경험해온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안될거라는 부정적 예견 등을 뚫어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생각을 억지로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성취의 반복을 통해 실재적 두려움을 품어낼 수 있도록 하는데 있을 것이다. 태어나서 첫 3년, 5년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생의 확신에 대한 내면화일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세상이 살만한 것으로, 나만의 관심에 흠뻑 빠져 마주하게 될 어려움들을 기꺼이 감당해낼 수 있는 아이가 되길 소망한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guavafam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