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개월] 아이의 서툰 공격과 복수심에 대한 단상

readelight

놀란 아이

3개월 전, ‘잘 때리는 아이에 대한 고민’을 올렸던 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 당시의 어려움을 가장 빠르게 모면할 수 있는 길이긴 하지만, 아이의 행동을 장기적으로 제한하는 외상이 될 수 있음을 늘 염두하고 있어 어떻게 해서든 인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곤 한다. (이전 글에서 “못된 짓 하면 악어 입으로 손을 잘라버리게 할 거야.” 라는 어른 입장에서의 거짓 위협에 불과한 표현이 아이에게는 가죽에 대한 공포증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제어하지 못한 감정이 불시에 분출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반성문을 쓰는 중이다..ㅜ) 다행히 아직까지는 위기의 순간들을 그럭저럭 잘 넘어간 듯 싶다. 물론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아이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어떤 태도가 마음의 상처로 자리잡았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라캉의 조언을 떠올려 보자면, 언젠가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보다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아픔들 또한 은연중에 드러낼 것을 기다려보는 것으로 아직까진 충분할 듯 싶다.

1. 새로운 폭력

어쨌거나 아이와의 성장의 여정은 ‘신체적 폭력’의 시기를 지나, 조금 더 세련된 ‘언어적 폭력’의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는 자기를 조금만 기분 나쁘게 해도 앵무새처럼
“아빠 미워.”
라는 말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아니면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아빠 검은 마음이 됐으면 좋겠어.”
라는 표현도 있다. 동화책에서 나오는 마녀들은 늘 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악마가 돼서 죽으란건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아 별로 동요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아직 좀 더 센 게 남았다. 이 표현은 은근 내상을 입게 만드는데, 자기 기분이 조금 더 나쁘면 눈 앞에서 사라져 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빠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물론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을 하면 아니라며 울고불고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언어적 폭력이 더 사무칠 수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2. 의도치 않은 불안감

며칠 전에도 아이의 마지막 표현에 기분이 언짢아져서 할머니 집에 놀러가는 아이를 두고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할머니 집에 보내고 내일 마중나가지 말아 볼까? 그렇게 하면 앞으로 그런 소리를 하지 않으려나?’
사실 그럴리는 없다. 내가 데리러가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는 자신의 표현 때문에 아빠가 서운해서 자기를 데려오지 않았다고 여기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았다면 애초에 그런 표현을 하지 않았겠지. 물론 이후에 만나서 ‘너의 못된 표현 때문에 화나서 데리러가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는 이미 마음에 상처를 입은 다음일 터다. 어쩌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 태도에 대한 충격으로 ‘엄마, 아빠가 나를 버릴 수도 있겠구나’라는 불안감이 은연 중에 아이를 사로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생각이 결코 과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앞선 경우처럼 자신의 표현이 아이에게 공포증을 야기할 수 있음을 알았다면 엄마는 과연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점 때문이었다.

3. 구조의 문제

한편 이에 못지않은 문제가 될 수 있을만한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결국 아이에게 그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하면서, 결코 솔직하게 얘기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해 버리는 건 아닐까? 분명 아이가 잘못한게 맞다고 하더라도, 내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 이런 방식으로 아이를 다스리려 한다면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스스로 좁혀나갈 것이 분명했다. 많은 상황에서 표현하기 ‘애매한’ 상황이 있음을 어른인 우리도 알고 있듯, 아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슬프게도 부모보다 친구들이 편한 이유가 되는 건 결국 ‘누적된 공감의 문제’, 나의 아픔이 얼마나 받아들여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기에 아무리 사소하게 보여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나쁜 생각을 가진 나에게

그러면 내 입장에서는 어떨까?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분명 지금의 불만을 풀어낼 (달리 말해 스스로를 보호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본능적으로 떠올린 것일 터다. 분명 아이의 표현은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외상을 자극하는) 일이었고, 그렇게 무의식은 환상이 되어 내게 나타났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이런 생각들을 ‘나쁜 것’, ‘악’으로 규정하고 털어낸 뒤 다시 좋은 아빠로 돌아가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읽어왔던 책의 저자들은 그와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젝이 라캉을 빌어 설명한 ‘환상을 가로지르기(환상 횡단)’는 나의 상징적 질서로 담아내지 못한 이러한 실재적 환상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주문한다. 물론 이것이 떠오른 나쁜 생각에 당위성을 부여해 그대로 ‘행동’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태도는 환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반사적 행동화에 불과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한 번쯤 곰곰이 따져 보는 것, 필자의 경우도 이렇게 글을 통해서 생각을 정리해보지 않았다면 쉽게 생각하지 못했을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에 있지 않을까? 물론 생각만 한다고 답이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쓰다보면 그동안 읽었던 책의 내용들이 불현듯 떠올라 얽힌 실타래를 풀어주는 역할을 해주었기에 그 가능성을 갈수록 더 굳게 믿게되는 듯 싶다.


어쨌거나 늘 그래왔듯 ‘아빠,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갈 시간이예요’ 를 알려주는 따님 덕분에, 오늘도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어서 깊이있는 지식들을 더 많이 내면화 해 필자를 비롯한 많은 분들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가면 좋겠다. 🙂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