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의 대체 휴일인 오늘은 출근한 아내를 뒤로 하고 아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의 요구에 이끌려 이런 저런 놀이를 하다 식사 때가 되어 함께 식탁에 앉았고, 먼저 식사를 마친 뒤 방에 들어가 있을 때였다.
“쨍!”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소리에 불길한 예감을 품고 주방으로 나가보았다. 소스가 담겨있던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아마도 아이가 너겟에 소스를 찍으려고 밀다가 떨어뜨린 듯 싶었다. 그 와중에 내가 언짢아 하는 표정을 먼저 본 듯 싶었다.
“아이고,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거야?”
비록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이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어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릇이 굴러서 떨어져 버렸어요.”
“그릇이 혼자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구?”
“응.”
“그릇이 어떻게 혼자 움직여~ 누가 움직이게 했으니까 움직이지. 어떻게 하다 떨어뜨린거야?”
“자기가 떨어졌어요.”
“그래? 아빠 생각에는 네가 거짓말 하는 것 같은데? 소스를 찍어먹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거 아니야?”
“아빠가 봤어요?”
“아니, 보지는 못했지만 식탁에 너 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누가 떨어뜨렸어요?”
“그릇이요.”
네가 떨어뜨렸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더니, 누가 그랬냐고 물으면 여지없이 그릇이라고 대답하는 아리송한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사기 그릇이라 적게 퍼진 파편을 간단하게 정리하고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잠깐 내려와 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직 음식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자 곧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 – 식사 시간을 축복과 공감의 언어로 채우고, 혼낼 일이 있을 때는 식사 후로 미룬다는 내용 – 이 떠올랐다. 곧바로 마음을 바꾸고는 먼저 맛있게 먹으라고 한 뒤 일단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아이를 데려와 거실에 마주앉았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지?”
“밥을 잘 먹지 않은거요?” (밥을 거의 먹지 않긴 했다.)
“아니 아빠가 쨍 하는 소리 듣고 나왔잖아. 뭐였지?”
“그릇 깨진거요?”
“응, 아빠가 누가 이렇게 했냐고 했을 때 뭐라고 했었어?”
“제가 깨뜨렸다고요.”
“응? 아까는 그렇게 얘기 안했잖아. 그릇이 스스로 떨어져서 깨졌다고 했었지?”
“네.”
처음에는 차분히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듯 보이더니, 이내 몸을 베베 꼬면서 못견디겠다는 듯 자꾸만 자리를 뜨려고 했다. 바닥에서는 대화가 어려울 듯 싶어 아이 의자에 앉힌 뒤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는 계속되었고 보다 못한 나는 엄하게 주의를 줬다.
“아빠는 네가 거짓말을 해서 기분이 좋지 않아. 그래서 같이 얘기해보려고 하는건데 이런 식으로 하면 기분이 더 나빠질거야. 그릇을 누가 깨뜨렸어?”
“제가요.”
“그런데 아까는 왜 그릇이 혼자 떨어졌다고 그랬어?”
“몰라요.”
“아빠가 화낼까봐 그런거야?”
주의를 줬을 때 잠깐 흘렀던 아이의 눈물이 더 크게 터져나왔다. 혼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거짓말하는 것이 좋지 못한 태도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데, 너무 몰아세웠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대로 아이를 안고 도닥여 주면서 아이가 인정하고 난 뒤에 해주고 싶었던 말을 이어갔다.
“아빠가 혼낼까봐 무서웠어? 미안해. 그치만 아빠는 네가 솔직하게 얘기해줬으면 오히려 더 기뻐했을거야. 엄마도 아빠도 실수도 하고 잘못하는 것도 많거든. 그런데 실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잘못한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야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거든. 그리고 그런 사람이 정말 용감한 사람이야. 너도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지? 혼내려고 한게 아니라 그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꼭 알려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꼭 솔직하게 얘기해줘, 알겠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렇게 약속을 맺고는 곧바로 장난스러운 놀이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아이에게 잘못된 태도를 알려준 것보다, 약속을 받아낸 것보다 더 기뻤던 것은 감정이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직전에 읽었던 책 『유대인 엄마는 장난감을 사지 않는다』에서는 이런 사례를 소개한다.
콜은 온갖 짜증을 부리며 엄마에게 칭얼거리다가 결국 선생님과 다른 학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의 뺨을 때렸다. 콜은 지역에서 저명한 랍비의 아들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아들의 따귀를 되받아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엄마 뺨을 때릴 수가 있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망신시키고, 아빠 명성에 먹칠할 수 있지?” 나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콜의 엄마 다니엘라는 전혀 감정에 동요되지 않았다. 콜의 두 손을 잡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앞으로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차분하고도 단호한 훈육이었다. 다니엘라는 아들 콜에게 대화와 설명을 통해 훈육했다. 감정에 동요되지 않은 일관성 있는 태도로 아이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고 설득시켜나갔다. 잘못된 행동이 있다면 아이의 태도를 좋은 에너지로 바꿔 주기 위해 부모의 훈육은 필요하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곽은경, 『유대인 엄마는 장난감을 사지 않는다』, p. 208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유대인 엄마의 반응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화를 통한 훈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가치관이 내면에 굳게 뿌리박혀 있음을 분명히 증언해주고 있었다. 저런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언어로 훈육해내는 사람이 있는데, 내 상황이 대수일까. 역시 사람은 좋은 사례를 통해 배워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범 사례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을 책은 그런 점에서 분명 많은 도움이 돼 주었다. 특히나 이렇게 내용을 곱씹으면서 글을 쓰는 것이 더욱 값진 것은, 놓치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 더 깊이 아로새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책을 더 빨리, 더 많이 읽고 싶어도 마냥 그럴 수 없는 건,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 내면화되는 성장의 기쁨도 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감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다양한 표상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인 듯 싶다. 고생스럽더라도 설득하는 대화를 통해 아이를 가르쳐야겠다는 기존의 생각은 선배들의 모습을 통해 굳은 확신으로 변모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미 그 인내의 열매를 곳곳에서 풍성하게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