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개월] 관대함과는 거리가 먼 아빠

readelight

허무한 남자

거실에서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큰 물건이 넘어진듯한 소리여서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방에서 나가보았다. 거실에 있는 낮은 장의 서랍들이 모두 나와있는 상태로 아이를 향해 쓰러져 있었다. 그 상황에서 부모가 마땅히 취해야 할 반응이란 어떤 것일까? 당연히 아이가 괜찮은지를 먼저 묻는 것일터다. 하지만 아이가 울지 않는 것으로 봤을 때 다행히 부딪치거나 가구에 찍혔거나 하진 않은 듯 싶었고, 자연히 눈길은 어지럽혀진 서랍장 주변으로 향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서랍장에 이르러서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아이가 깔린 상태는 아니었고 다만 자기도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거야? 괜찮아?”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순간이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의식의 수준에서는 계속해서 아이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아이에게 나가는 반응은 타박하는 식으로 나갔던 것이다. 아이를 염려하는 말투가 나가야 되는데 기분이 내키지 않다보니 두 반응이 뒤섞여 나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치 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 같았다. 1차적 관심은 쓰러져 있는 서랍장을 세우고 떨어진 물건을 다시 올려놓는 ‘정리’ 작업으로 향해 있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대단히 깔끔하게 지내는 편도 아니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어지럽혀지는 것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아이보다는 정리가 먼저였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하는데 먼저 관심을 두고는, 남은 관심을 선심쓰듯 ‘아픈데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여기도 아팠고 여기도 아팠다며 발가락과 손가락을 가리켰고 다행히 부딪쳤거나 눌린 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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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야할 일에 초점을 둔 것에 대한 미안함

당시 상황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관심을 오롯이 아이에게 주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 때 아이만이 주된 관심사임을 알게 해줬다면, 그렇게 아이를 먼저 보듬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를 먼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고 달래준 다음 정리를 했다면, 아무리 표현이 서툴다 하더라도 아빠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준다는 따뜻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체 왜 꾹 참아야만 했을까? 아이를 먼저 보살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사실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치워야되는 것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건 비단 이 때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긴 했다. 많은 상황에서 아이의 요구에 대해, 아이에게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못해 미안할 때가 참 많았다. 아마 아빠가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말할 때 아이가 잘 수용해주는 것도, 늘 미적거렸던 아빠의 반응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2. 관계에 대한 우선순위 문제

이처럼 삶의 우선순위 문제와 맞닿아 있는, 특히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우선순위를 적절히 배분하지 못하는 것은 필자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가족과 놀러 나갈 때도 책을 꼭 끼고 가면서 읽을 기회를 노린다. 그러다가 그런 상황이 마련되지 못하면 초조한 마음과 함께 불쾌한 반응을 드러내곤 했었다. 요즘에는 ‘어떻게든 잠시라도 읽어야지’라는 마음보다 ‘읽을 기회가 생기면 봐야지’ 정도로 다소 느긋해지긴 했지만, ‘관계에 있어서의 수동성’이라는 이런 측면은 아내와 늘 타협점을 찾아야만 하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의 고민을 통해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이에게 조금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확대해 예로 든 ‘관계의 구조’ 문제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 만큼이나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가족에게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도 이런 입장을 많이 이해해 주고 있긴 하지만 내면에 풀리지 않을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당장은 함께 어디론가 이동할 때 행선지를 먼저 찾아보는 것 정도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아내는 내려놨다고는 하지만 피곤할 때는 타박의 이유가 되곤 한다) 습관으로 자리잡은 다음 조금씩 범주를 늘려가 봐야겠다. 그 외에도 함께하는 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적절히 개인 시간을 배분하는 문제나, 마무리 짓지 못한 일에 미련을 두지 않는 등 차차 풀어나가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다. 어쨌거나 언제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건) 쉽지만, 둘을 지혜롭게 취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다만 아가페는 결코 에로스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지젝의 바울 해석을 통해 마음의 위로를 얻으면서, 날마다 죽는 과정을 반복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식의 아가페에서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거의 칸트식의 방식 一 자발적인 관대함의 넘침인 주제넘은 자세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자기 억압적 의무로서… 一 것으로 사랑을 생각해서 사랑을 초자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아가페는… 에로스와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입장이 아닌가? 사도 바울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입장은 오히려 법의 한계 내의 사랑, 즉 법에 의해 생성된 죄의 잉여를 억압하는 투쟁의 사랑이 아니던가? 그래서 진정한 아가페는 자발적인 선의 온당한 분배에 더 가깝지 않던가?
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p.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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