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마음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가도 조금만 언짢다 싶으면 여지없이 돌변해 자신의 ‘썽’난 감정을 표현하기 일쑤다. 그렇게 오늘도 아빠는 미워서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이 되었고, 반성의 시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이번 사건(?)은 욕실에서 벌어졌다. 아이는 저녁 때가 다 되어서 낮잠을 잤던 터라 11시가 넘어가도록 잠자리에 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이를 먼저 씻기고 샤워를 하려고 기다리며 권유하기를 몇 차례 하고나자 겨우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옷을 벗고 양치를 시작했다. 함께 양치를 하며 이제야 하루를 마무리지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올라왔는데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아이에게 헹굼용 컵을 주고 필자는 손으로 먼저 입을 헹궜는데, 아이는 평소처럼 컵에 물을 받지 않고 엉뚱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얼른 입 헹구자~.”
한 두 차례 이야기를 하자 컵에 물을 받는듯 싶더니 옆으로 흩뿌려 버렸다. 제 딴에는 기분이 나빴다는, 잔소리하지 말란 뜻이다. 그렇게 되면 뒤에 있던 아빠에게도 물이 튀게 마련이라 그동안의 경험상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도 옷만 젖지 않았으면 주의만 주고 말았을텐데, 영 찝찝한 상태가 되자 심술기가 발동해 아이 얼굴에 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효과는 곧바로 찾아왔다. 두어 번 뿌리자마자 울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울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달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받아줄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어 그저 미안하다고 하곤 컵을 손에 쥐어주기도, 물을 담아 주기도 했지만 역시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그저 내 길을 가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몸에 물을 뿌리자 아이는 하지 말라며 더 울기 시작했고, 이제는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대로 바디 샴푸를 묻히고, 머리를 감기며 씻기기를 강행(?)했다. 한편 그러는 와중에 신경쓰였던 것은 새벽 근무를 다녀와 피곤하게 잠든 아내가 깨는 것이었다. 좀 조용히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도통 그럴 생각도 없이 의지를 담아 우는 모습 (진짜로 슬퍼서 우는게 아니라) 을 보니 결국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이를 악문 상태에서 (쓰면서 보니 나는 아무래도 아내가 무서웠던 것 같다.)
“좀 조용히 하라고…”
라고 하고는 손에 힘을 줘 머리를 다소 거칠게 감겨주었고, 이내 진짜 (더 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아이를 달래주고 싶지도,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얼른 씻겨서 내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결국 계속된 울음소리를 듣다 못한 아내도 나와 아이를 달래면서 주의를 주었고, 나는 비눗기를 씻겨내자마자 아이를 넘겨 주었다. 그렇게 불쾌한 상황을 모면하고는 욕실을 정리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순간 욱하긴 했지만 분명 화가 많이 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빠가 자신을 거칠게 대했다는 충격을 받은 아이는 어땠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 길로 안방으로 가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성 부모는 아이의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줘야 한다는 교수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고, 상처받은 마음이 오래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곤 아빠랑 같이 장난친건데 그때부터 계속해서 울어서 화가났었다고도 이야기하자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던지 끅끅 하며 울음을 삼켰다. 빨리 와서 아이를 달래주길 잘했구나 싶었다.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
그렇게 험난한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을 피해갈 수 있을까? 아니, 그 때가 오면 나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그 때가 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아이는 자기 감정에 충실해 나의 한계인 실재를 드러나게 할 것이 뻔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로의 실수를 빠르게 인정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저 반복되기만 할 뿐인 이런 어려움을 좀 더 나은 방향에서 대응할 수는 없을까? 기대를 내려놓는, 어쩌면 체념과도 같은 이런 태도를 성급히 도입하기보다 더 나은 전제가 될만한 것은 없을까?
마침 그날 오후 아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내의 경우는 식사 문제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기껏 음식을 준비해줘도 아이가 먹지 않으려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우리가 내렸던 결론은 결국 서로가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 달리 말해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이자는 생각이었다. 지젝이 조화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기성 질서를 분열시키며 탄생한 기독교를 옹호했듯, 서로간의 조화를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기보다 때로는 분열 자체를 즐길 줄 아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까지가 엄마의 권리라면, 그것을 먹을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이의 권리임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듯 싶었다. 엄마가 애써서 만들어 줬으니 ‘당연히’ 먹어야 한다는 전제 자체를 내려놓음으로써, 나의 경우 아이가 우는 상황이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굳이 연민이나 존중을 향한 의지를 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감당할만한 것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전제가 부모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의미있는 선택지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선택을 전적으로 아이의 몫으로 남겨두면서 아이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제시한 가치관을 기쁨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분명 스스로 결정했지만 본받고 싶은 마음을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부모이기 이전에 서로에게 독립된 인간으로서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인생의 선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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