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이와 단둘이 키즈카페에 갔다. 아이는 입장하기 무섭게 사라졌다 돌아와서는 내 손을 이끌고 낚시놀이와 방방, 자동차타기 등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건은 자리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을 때 일어났다. 어느 순간 울면서 아빠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주변에 누군가 마찰을 빚은 친구도 없는 듯 싶어 일단 안고 자리로 향했다. 다만 요즘들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는 경우도, 토라지는 횟수도 늘어 우는 것 자체가 살짝 피곤했던터라
“우리 그냥 집으로 갈까?”
라며 달래는 말투로 위장한 협박을 했다. 아이를 초조하게 만들어 행동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옳지 못한 방법임을 알면서도 힘들때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못된 기술이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품에 안은채 자리에 앉아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억눌렸던 화가 치민듯 온 힘을 다해 발길질을 하며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정도로 화가났던 걸까? 순간 아이를 통제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올라왔지만, 최근 있었던 다양한 기억들 덕분에 일단 아이가 감정을 추스르기까지 기다려보기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주마등처럼 스친 기억의 조각들
악을 쓰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기억들이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라면 지난 달에 있었던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 우리 아이는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다 정상적으로 내려오는 다른 집 동생과 엇갈려 울기 시작한 뒤, 20여 분 가량 그치지 않았다. ‘동생을 쓰레기통에 버렸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도저히 받아 줄 수가 없어 입을 톡 때린 것이 화근이 되었던, 그 상황에서도 놀랐을 아이의 입장을 살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글이었다. 이후 비슷한 사건이 한 차례 더 있었다. 며칠 전 실내 놀이터의 십자 모양의 회전바를 타다가 우리 아이가 넘어졌는데 다른 언니가 모르고 계속 돌려서 어딘가가 부딪쳤던 모양이었다. 서럽게 우는 통에 안고 달래주었는데 “언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라는 얘기를 했다. 마침 이전 상황이 생각나 “그래도 그렇게 얘기하면 어떡해.”라는 표현으로 순화시키고 아이를 달래줬었다. 함께 있었던, 현재 상담을 하고 계신 엄마는 그래도 시비를 가리는 것은 감정이 풀리고 난 뒤에 할 일이라고, 처음엔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그냥 수용해 주라며 조언을 해주셨다. 자신도 젊었을 때는 잘 몰라서 그저 필자를 올바르게 키워야겠다고 많이 강압적으로 다스렸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식한 행동이었다고 반성하는 말과 함께 말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에 현재 읽고 있는 책의 내용도 떠올랐다.
많은 부류의 치료자들은 부정적 전이…의 출현을 회피하거나 즉시 중화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공격과 분노의 감정이, 분석행위자가 치료자에게 투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감정으로 변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환자들은 치료시에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환자들이 그러한 감정을 표현한다면, 치료자는 재빨리 기회를 잡아 분석행위자가 투사하고 있음, 즉 분노와 공격은 실제로 치료자를 향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여 감정의 강렬함을 완화함으로써 그 투사를 치료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을 제거해버린다. 요컨대, 치료자는 그러한 분노와 공격을 감당해내기보다는 도리어 ‘합리적으로’ 진찰한다.
브루스 핑크, <제 2장. 주인 기표와 네 담론>, 대니 노부스 외 7인,『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pp. 64 – 65
평소 정신분석에서 환자를 대하는 분석가의 태도란 정확히 자녀를 대하는 부모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믿고 있다. 불가피하게 상담이 필요한 이유는, 부모의 심리적 어려움들로 인해 자녀들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문의 내용은 그동안 필자가 취했던 태도들을 콕 찍어서 지적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요구(전이)’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동안 필자는 끝까지 이성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계속해서 의식하며, 차차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코 ‘전적이진’ 못했기 때문이다.
공감의 대화
다만 이번에는 앞선 기억들에 힘입어 보다 여유있게 아이의 분노를 받아줄 수 있었다. 아이의 발길질을 억누르는 대신 아프게 하는 부분만 살짝 피하면서 등을 도닥여주었다. 누가 이렇게 화나게 했느냐며 달래주니 오히려 격정적이었던 아이의 태도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정되었다. 역시 지난 번에 아이가 20분 가량이나 울었던 이유는 ‘공감해주지 않는 아빠’를 향한 서러움이었던게 틀림 없었다. 감정이 가라앉는 아이를 보면서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자 아이는 자기가 운 이유를 밝혀주었다.
“아저씨가 나가라고 했어. 아저씨 미워!”
“아 아저씨가 나가라고 해서 운 거야? 그랬구나.”
사실 생각해보면 아이의 주장은 어이없는 일이긴 했다. 키즈카페의 낚시터 아래 물고기가 놓여있는 공간은 공통적으로 직원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어떤 친구가 계단 밑 틈새를 통해 들어간 것을 보고 따라들어가 바닷속을 휘젓고 놀다가 직원에게 불려나왔던 것이다.
아이가 들어갔을 때에도 곧바로 나오라고 하긴 했지만, 새로운 공간을 개척한 즐거움을 말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잠겨있는 문을 통해서는 들어갈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작은 아이들만의 아지트가 된 (조금 큰 아이들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셈이었다. 이 때문에 직원이 와서 알아서 내보내겠거니 하고 발길을 돌린건데 상황이 요상하게 정리돼 있었다. 분명 아이의 반응이 어이없는 일인 것은 아이가 잘못한 것이 명확하다는 점, 그리고 겁을 준다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기에 그냥 이야기를 듣고 나왔으면 된다는 측면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적어도 전자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나오려고 했는데!”
“아 나오려고 했었는데 아저씨가 나가라고 한거야? 속상했겠네.”
“아저씨 미워. 아저씨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렇지. 아저씨가 미우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못된 입을 제지하는 손놀림도, 아이를 가르치는 훈계도 없었다. 계속해서 훌쩍거리며 분을 삭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품에 안고 도닥여줄 뿐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홍역을 치루고 난 뒤, 땀으로 흥건해진 아이의 열기를 식혀주기 위해 주스를 사러가자고 이야기하고 매점으로 갔다. 아이의 손에는 뽀로로 과자와 주스, 맨토스가 들려 있었고 자리로 돌아와 기분좋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제 기분 괜찮아졌어?”
(끄덕)
“아까 어떤 것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어?”
“아저씨가 내보내서.”
“맞아, 그랬지. 근데 저기 들어가도 되는 곳이야?”
“아니.”
“그럼 들어가면 안되는 곳에 들어갔으니까 아저씨가 나오라고 해야 되지 않아?”
“안돼.”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해야 돼?”
“……”
“어렵다 그치.”
대화는 결론 없이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명확한 결론이 난 것보다 아이에게 더 깊은 여운을 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몫을 아이에게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경험을 통해 아이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 경험이 아이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어떤 연상 과정을 거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되면 그 땐 조금 더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를 드러내 줄 아이의 태도를 통해서 말이다.
분석가는 전이의 사실 자체를 해석한다거나 분석행위자에게 그/그녀가 무언가를 자신에게 투사 또는 전이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기보다는, 분석행위자가 투사의 내용(관념적이고 정념적인 내용)을 언어화하는 데 조력하면서 그것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 그것을 일소하거나 금지하지 말고, 그것에 대해 분석행위자가 죄의식을 느끼게 하지 말며, 오히려 그것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 이때 분석가는 해석보다는 질문을 통해, 내용(사고와 감정)과 그것을 최초로 불러일으킨 사람, 상황, 관계들 사이의 연관성을 재-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브루스 핑크, <제 2장. 주인 기표와 네 담론>, 대니 노부스 외 7인,『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pp. 66 –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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