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개월] 부모의 분노와 아이의 용기 사이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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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서 손을 뗀 용감한 아이

요즘은 아이의 삐침과의 전쟁이 한창이다. 조금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미워!”를 연발하기 일쑤인데, 그나마 무조건 소리 (라는 비명) 를 지르던 것에서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이제 한 번 정도는 자기가 원했던 바를 설명해주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휴, 아빠 그냥 달라고 했잖아! 이렇게 주면 어떡해?!”

물론 전혀 고운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체로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듯 싶었다. 여기에서 엄마와 아빠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만약 아이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주지 않으면 다음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보통은 때리기를 시전하는데, 이미 수백 차례 주의를 받아왔기 때문에 한 두 차례 시도만 하다 단념하고는 마무리 멘트를 던진다.

“흥, 아빠랑 안 놀거야. 아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제 딴에는 가장 높은 수준의 비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왠지 말의 책임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단 둘이 있었던데다 마침 밤이기도 해, 의지할 대상이 정말로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 자기가 뱉은 말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아이의 요구에 알았다고 대꾸하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니에요!”라고 외치며 곧바로 뒤쫓아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웬 걸, 따라 나오기는 커녕 현관문에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복도의 센서등도 모두 꺼지고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멍하니 서서 몇 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집 안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벨을 누르고 다시 숨어 봤다. 그제서야 안에서 “누구세요?”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지만, 아이는 밖에 아무도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곧장 들어가 버렸다. 어라…? 이렇게 되니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나올 걸… 결국 터덜터덜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 모습을 본 아이는 다가와서

“아빠 사라져 버리라고 해서 미안해.”

라며 담백한 사과를 건넸다. 정말 미안해 보이는 아이의 표정으로 봤을 때 밖에서 느꼈던 것처럼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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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눈을 가린 아이 (출처 : Unsplash)

“아니야, 무서웠을텐데 아빠가 그렇게 갑자기 나가버려서 미안해.”

그렇게 같이 사과하고는 방금 전 상황에서 염려가 되는 부분을 이어서 알려주었다.

“그런데 혼자 있을 때 아까처럼 함부로 문을 열어주면 안돼. 만약에 나쁜 아저씨가 너 데리고 가면 엄마랑 아빠를 못 보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무한테도 문 열어주지 말자. 알겠지?”

이런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내심 속상하긴 했지만, 가장 우려스러웠던 부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별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 줘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사실 낮에 혼자 분리수거를 하고 온 적은 있었다. (물론 그 때도 아빠 혼자 다녀오라고 해서 갔던 거긴 하지만) 하지만 불이 꺼져 있는 상태는 조금 무서워 하는 모습을 보여서 밤에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두려움에 마음을 쏟지 않는 아이가 되길

3개월 가량 전에 자기 방에서 혼자 잠드는 아이를 보며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즉 부모와의 심리적 분리를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대상을 향한 신뢰와 그 믿음의 내재화라고 하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바라봤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아이에게 지나치게 겁을 주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이 생각 이후에 쓴 글이긴 하지만 라캉의 공포증 사례 분석은 그 의미를 더해 주었다. 부모가 혐오하는 아이의 행위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위협을 줬던 것이 전혀다른 대상과 연결되면서 공포증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과도한 반응, 대표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그만큼 아이가 공포에 사로잡힐 가능성을 높인다고 볼 수 있다. 부모가 화를 내는 이유란 지금의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는 가장 정직한 고백, 즉 부모 자신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실재적 지점과 매우 가까워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현된 두려움이 빚어낸 상황은 아이에게 동일한 감정을 그대로 전가시킬 가능성이 높기에, 분노를 많이 표출할수록 아이에게 각인되는 공포의 양 또한 비례해서 늘어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의 경우가 그랬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했는데, 그 공포는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에 더 가까웠다. 직접 겪었다기 보다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추측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험을 통해 느끼는 두려움이 더 클까, 아니면 상상으로 느끼는 두려움이 더 클까? 아이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후자 쪽이지 않을까? 적어도 대상을 경험했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두려운지 그 이유와 범위를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지만, 상상 속에서는 말 그대로 어린아이의 모든 상상력이 총동원된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니지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적인데다가, 신체 조건마저도 비교가 되지 않는 가운데서 아이가 느낄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사실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도 아버지와 관련한 긍정적인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좋은 기억들도 제법 있었을텐데)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좋은 기억들을 여전히 강하게 억누르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관계에 있어서 다양한 어려움들로 재현된 이런 두려움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에 내 아이에게는 결코 이런 감정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덤덤한 태도 (필자가 보기에는 용기있는) 가 놀라우면서도 고마웠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불필요하게 발생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에너지를 허비하기 보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세워가는데 오롯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물론 때마다 참기 힘든 상황들이 벌어져 실수하고 반성하는 과정이 반복되고는 있지만, 다행히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이를 사로잡을만한 두려움이 각인되진 않은 듯 보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pexels
* 본문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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