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또 자주하게 되는 고민은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아이가 분출한 정서의 물줄기를 자연스럽게 돌려놓을 수 있을까? 이미 기분이 나쁜 아이를 대할 때 나는 어떻게 하려고 노력해 왔는지 생각해 봤다. 사실 할 수 있는 건 언어 밖에 없었다. 끝없이 설명하고 끝없이 타이르며 아이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물론 비폭력의 특성상 (언어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그 효과를 빠르게 경험하긴 어려워 인내심을 시험받는 상황이 적잖이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아마 개인적으로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다는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듯 싶다. 다만 그럼에도 아이가 커가면서 우리가 애써왔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또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심한 척 이미 하나 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구나 싶어 늘 고마운 마음이 든다. 물론 이런 감동을 주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곤 하지만.
1. 놀이로 바뀐 분노
엊그제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엄마와 기분좋게 샤워를 마친 아이에게 로션을 발라주려고 침대에 눕혔을 때였다. 보통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잘 누워 있었는데, 그 날은 포근함을 느끼고 싶었는지 눈에 띄는 인형을 끌어 안고 있었다. 하지만 옷처럼 자주 빠는 것도 아니고, 털, 먼지가 로션에 엉겨붙은 그림이 그려지자 곧바로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로션을 먼저 바르고 안자며 인형들을 달라고 한 뒤 아이의 머리 윗쪽으로 옮겨 주었다. 하지만 한 번 마음 먹은 일을 곧바로 멈추게 하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아이 손에 닿지 않을만한 곳으로 인형을 가볍게 던져 놓았다. 그러자 아이도 이제는 짜증이 났는지 울기 시작했다. 미안한 일이긴 했지만 안그래도 피부가 건조해 수시로 긁어대는 상황이라 마냥 기다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아이를 미안하다고 달래며 로션을 발라주기 시작했지만, 이미 기분이 나빠진 상태에서 그대로 받아줄 리가 없었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거부 방식인 발차리를 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보통 이런 상황은 아이가 누워있고, 엄마와 아빠가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많이 벌어진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손으로 때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많이 얻어맞게 되는데, 그 때도 순간적으로 턱을 걷어 차였다.
“아! 아빠 혀 깨물 뻔 했잖아.”
말을 하고 있었으면 정말 혀를 깨물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순간 욱하긴 했지만,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계속 발을 구르니 좀처럼 로션을 발라주기 어려운게 또 문제였다. 인형을 다시 줄 순 없고, 그냥 달래줘야 되나? 순간 고민이 되긴 했지만, 그 동안의 경험상 로션을 바를 때는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 장난감만 허용해줬음을 알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의 진행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발을 잡아 누르는 건 너무 폭력적이고, 그렇다고 피곤한 상태에서 마냥 받아주기도 어려운데…….
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나는 일단 인정사정 없이 날아드는 발을 붙잡기만 한 상태에서 힘을 뺀 채 움직임에 맡겨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떠오르는게 있었다. 아이는 제멋대로 발을 굴렀지만 내 손에 각각 쥐어져 있어 움직임이 제한됐는데, 그 상태가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거기에 장난기가 발동해 곧바로 아이의 발버둥에 살짝 힘을 줘 페달을 돌리는 것 같은 동작을 만들어 주었다.
“우와 자전거 잘 타네!”
아마 처음에는 ‘내가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 장난을 친다’는 느낌이 들어 더 짜증이 났을 것이다. 더 커진 울음 소리와 동작을 통해 그런 마음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동작마저도 자전거를 더 열심히 탄다고 너스레를 떨자 어느 순간엔가 자기도 못참겠던지 까르르 웃으며 아빠의 장난에 동참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 번 웃음이 터지자 계속된 발버둥은 더 이상 짜증의 표현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자전거를 탔을 때처럼 열심히 발을 구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곁에 있던 아내에게 역시 아이들은 단순하다며 비로소 웃음지을 수 있었다.
2. 흐름에 맡겼을 때 찾아온 것
아마 평소대로였다면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잠시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난처했던 상황이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게 해결됐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한 번쯤 곱씹어 볼만한 교훈이 될 것 같아 글로 남기고 싶었다. 아무래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변화가 일어난 순간이었지만, 그에 앞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내가 취했던 행동이 있었다. ‘감정을 분출하는 아이의 정서적 흐름을 바꿔주기 위해’ 선택했던 것은 아이와의 동일시였다. 발버둥치는 아이의 표현에 동참하는 가운데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떠올랐고, 아이가 느끼기에도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나지오 박사가 말하는 분석적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동일시였다. 내담자의 감정에 동참하던 중 떠오른 환상을 통해서만 해석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조언을 섣불리 가해선 안 된다.) 물론 아이의 깊은 감정에 함께 침잠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아이와 삶의 역사를 함께해 온 경험이 있어 ‘자전거를 즐겁게 타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불편한 상황을 외면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기꺼이 뛰어드는 가운데 떠오르는 환상을 붙잡았던 것. 비록 의미 부여를 하기엔 매우 사소한 사건이긴 하지만, 앞으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될 때마다 하나의 사례로써 두고두고 떠올리게 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