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가장 자주하는 놀이 중 하나는 레고 만들기다. 다만 아직 크기가 작은 레고는 잘 다루지 못해 주로 듀플로 블록을 갖고 노는데, 이게 어른 입장에서는 크기도 크고 종류도 단순해 만들 수 있는 모양이 제한적이라는 (노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그저 최대한 높이 쌓는 식으로만 갖고 놀다가, 점차 독특한 모양의 탑 만들기로, 최근들어 호환되는 블록을 이용해 긴 미끄럼틀을 만드는 식으로 놀이 방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단조로운 부품을 활용해 나름의 복잡한 구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게다가 보는 즐거움까지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블록 놀이 때에도 미끄럼틀을 만들기 위해 관련 블록을 모으기 시작하자 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오늘도 놀이동산 만들어?” (아이는 이걸 놀이동산이라고 부른다.)
“응.”
“왜 아빠는 맨날 놀이동산만 만들어?”
“아빠는 놀이동산 만드는게 재미있어서 그렇지. 너도 동물들 집 만드는거 좋아하잖아, 그치?”
“맞아. 나도 내 마음대로 만드는게 좋아.”
“오 맞아. 내가 원하는대로 만드는게 정말 중요해.”
“응.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하는 건 좋지 않아.”
1. 아이의 고백이 인상 깊었던 이유
무심결에 나온 아이의 연속된 고백에 순간 깜짝 놀랐다. 따로 알려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갖게 된 걸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아이의 반응을 봤을 때 이런 생각이 짧은 기간에 형성 됐다거나, 또는 단순히 유치원에서 배워서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의 ‘누적된 경험’에서 우러나온 반응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이 나름의 시도와 실패, 그리고 성공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성취감이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 누리는 것보다 더 즐겁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평소 다른 어떤 것보다 아이가 주체적으로 경험한 성취감이야 말로 성장을 추동하는 (배움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부족하나마 아이가 최대한 스스로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독려하고자 노력해 오긴 했었다. 아이가 필요를 느끼고 요구하기도 전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양육 방식은 도리어 아이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더 나아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게 만드는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 『유대인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 에서도 대만인 저자가 유대인 유치원에 아이를 맡겼을 때의 일화가 나온다. 그녀는 여느 동양 엄마들처럼 3 ~ 3.5 시간 정도의 간격으로 아이에게 수유를 해주길 요청했는데, 영아반 선생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노심초사하게 된다. 이제껏 때 맞춰 수유를 해와 아이가 운 적이 없었다는 그녀의 자랑스러운 이야기에 진지하게 면담 요청을 했던 선생님이 해 준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바로 아이에게 배고픔을 알릴 기회를 주라는 것. 이 시기의 아기가 울음을 통해 자신의 기분을 전달하면서 의사소통 기술을 연마하는데, 요구 이전에 엄마가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은 아이의 학습 기회를 빼앗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 덕분에 저자는 시간을 정해 아이에게 젖을 먹여온 것이 결코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선행’이라는 이름 하에 이런 양육 방식이 교육 현장에서 얼마나 판을 치고 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그런 분위기가 많이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지만, 여전히 그렇게 애써서 부모의 욕망을 주입하는 경우에, 그 아이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이의 뜻밖의 고백에 놀랍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누적된 인내와 축복의 작은 결실로 와 닿았던 것이다.
물론 필자의 육아일기를 보셨던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여러 모로 실수 투성이에 육아일기라기 보다는 차라리 반성일기 + 긍정 해석의 결정체라고 보는게 나을 정도긴 하다 (글로 남기지 못했던 실수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해 감정적으로 대하기 일쑤고, 더욱이 요즘에는 우는 것을 참기 더 어려워진 것을 부쩍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특히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관련 책들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반성해 왔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흔들릴 때마다, 설령 흔들리더라도 반성하고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굳건한 기둥이 돼 주었기 때문이다.
2. 선택에 어김없이 뒤따르는 문제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가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에 대한 당부 (잔소리) 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맞아.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따라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한 게 너무 멋있고 마음에 들어서 따라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잖아. 그렇게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걸 배워서 잘하게 될 수도 있으니 좋지 않을까?”
“아니야. 내 마음대로 하는게 좋아.”
“응 맞아, 그게 가장 좋지. 그래도 친구들이 네가 하는 걸 해보고 싶어할 수도 있으니깐 그럴 때는 기분 좋게 받아주자. 알았지?”
“응.”
정신분석 뿐 아니라 많은 육아 지침들을 보면, 아이가 5살 (최소 3살) 때까지는 ‘전능함’을 만끽하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 주는 부모를 통해 내가 생각하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선명한 자기 인식을 갖게 된다. 아이의 본질적인 자존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때의 자존감과 자신감이 이후 삶에서 아이의 학습 능력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성장 과정에서 아이의 작은 성취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칭찬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과업에 도전하고 실패하고, 마침내 달성하는 과정을 거칠 때 주어지는 환희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정이 험난하다 하더라도 결국엔 기쁨의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삶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해 지속적으로 높은 성취를 달성할 수 있음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아이의 기를 살려준다고 표현하는 이런 방식은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와 부딪치게 된다. 현재 우리 부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기도 한데, 한껏 고양된 아이의 자아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앞선 대화가 이런 패턴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면 더 힘들어하고 (가위 바위 보에서 지면 맨날 이긴다고 삐지거나), 조언을 해주면 자신의 말이 맞고 엄마, 아빠는 거짓말쟁이라고 몰아 세운다. 결국 어렸을 때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아이의 시도에 대해 인내하고 격려해줘야 했다면, 이제는 나의 생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계속해서 알려줘야만 하는 정반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이제는 알 것이라고 여기는 가정이 아이를 좀처럼 받아주기 어렵게 되는 문제까지 더해진다.
물론 이런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그저 아이가 잘 수용해주는 설득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반복해서 나누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지난 글 (타인의 환상을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 에서 지젝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개개인이 갖고 있는 환상의 원인은 결코 단순화시킬 수 없다는 것. 분명 환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결과물이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욕망은 결코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3. 생각보다 부쩍 커버린 아이
그렇게 블록 놀이를 마치고 빨래 개는 모습을 보던 아이가 도와주겠다며 곁으로 다가왔다. 순간 마음에 들지 않게 갤 것이 눈에 보여 선뜻 대답하지 못했으나, 앞서 했던 생각들이 떠올라 아이의 시도를 묵묵히 지켜볼 수 있었다 (역시 육아 반성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은 듯 싶다). 그런데 웬 걸, 생각보다 독특하게, 또 나름 형태를 잘 잡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아직도 아이를 잘 모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믿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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