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에 대한 고민은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는 것이다. 단지 한 두 차례 발생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는 최근 1년 동안 그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 문제라고 인식된 경우다. 집에서는 자기 세상인양 거리낌 없이 감정을 표현하던 아이가 조금이라도 낯선 대상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한 상태가 되어 엄마 아빠 곁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런 긴장감을 내려놓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고 말이다. 불과 2년 정도 전만 해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은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던) 고민이 살짝 진지하게 다가왔다.
사실 이제껏 아이의 이런 모습이 크게 염려되지 않았던 것은 아이가 현실감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도 우리처럼 다양한 선택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을 충분히 느껴야 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 (시간) 가 필요하다. 오히려 낯선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은 이런 불편함에 대한 무감각, 즉 현실적 위험 가능성에 대한 몰인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려움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는 것은 그 반대의 문제이고 말이다. 따라서 아빠의 입장에서 아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성장에 따른 현실인식 – 안정감이 든다고 느껴질 때까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조치 – 의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사건들은 이런 생각에 조금씩 균열이 가도록 만들었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부분을 충분히 설명하고 기다려주면 용기있게 도전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왔는데, 역시 말은 빠르고 인내는 길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1. 직접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아이가 놀이터에서 가장 타고 싶어하는 놀이 기구는 그네이다. 며칠 전 동네 놀이터에 갔을 때도 아이는 다른 기구들은 제쳐두고 가장 먼저 그네에 올라탔다. 특히 그 날은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들 여섯 명 정도가 몰려와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네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많은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타려니 영 불편할 것 같아, 이미 어느 정도 탄 상태였던 우리 아이에게 이야기해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 친구들도 어느 정도 타면 자리를 비워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요 녀석들이 함께 노는데 빠져서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다른 놀이를 하던 아이도 점차 그네 쪽을 바라보면서 “나도 그네 타고 싶은데…….” 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오빠들이 조금만 더 타고 비켜줄 거라고 달래주긴 했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선뜻 자리를 내줄 것 같진 않았다. 결국 계속해서 주변을 서성이던 아이는 내게 와서 타고 싶다며 조르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아이들에게 한 자리만 양보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먼저 자기 의사를 표현해줬으면 하는 생각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빠들한테 가서 그네 타고 싶다고 얘기해 봐. 만약에 그렇게 얘기했는데 안 비켜주면 아빠가 도와줄게. 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얘기할 수 있어야지, 아빠가 곧바로 도와줄 수는 없어.”
처음에는 싫다고 버티던 아이는 몇 번을 주저하더니 용기를 내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걸음 뿐, 이내 되돌아와 아빠 품에 안겼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빠들이다 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같은 태도로 아이를 독려해 주었고, 아이는 그렇게 두어 차례를 더 시도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그중 한 아이가 눈치를 채고는 그네를 타고 싶냐고 먼저 물어왔다. 아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그네 타기는 성공할 수 있었다. 간접적으로나마 의사를 전달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직접 얘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봐봐, 그래도 타고 싶다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오빠들이 먼저 비켜주지?” “응.” “그래도 용기 내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한 번 직접 얘기해보자, 알았지?” “응~!”
2. 동생에게도 쩔쩔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조금 더 최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공원 내 놀이터에는 똥 모양의 큰 조형물이 있는데, 나선으로 되어 있어 아이들이 빙글빙글 돌며 올라가거나 내려가며 노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아이는 이런저런 놀이기구를 타다가 그 조형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마침 위에서 내려오던 남자아이와 마주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두 살가량 어려 보였는데, 아이는 난처했는지 나를 먼저 바라보았다. 그때도 아이가 먼저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있었는데, 남자아이가 답답했던지 옆으로 피해 지나가면서 갈등 상황은 금방 종료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살짝 밀쳐져 손을 짚게 된 아이가 이내 울음을 터뜨려 지나갔던 남자아이도 당황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 순간의 모습이 적잖이 실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별 말없이 다가가 안아주었다.
3. 정작 문제였던 것
앞서 언급한 두 상황이 하나의 문제로 연결되는 지점은 ‘아이의 용기 없는 태도’에 있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 낯선 사람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하고, 연장자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어린아이에게도 쩔쩔매는 모습이 많이 속상했던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이유를 생각해보고 싶어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가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독려해주고, 무언갈 잘못해서 알려줄 필요가 있을 때는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며 대화로 풀어가려고 노력해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용기는 믿음에서 나오고 믿음은 자존감, 즉 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경험적 자기 확신이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이럴 때 역시 글이 좋은 것은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고 그 때의 감정과는 조금 거리를 둔 상태에서 계속해서 곱씹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쓰면서 계속 자문해 보았다. 완전한 자존감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무한히 사랑해주고 지지해 준다면 그 아이는 무한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지나치게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를 내맡길 위험, 즉 현실감이 부족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정말 많은 사랑 (은혜) 을 받았던 나는 그만큼의 용기를 갖고 있을까? 물론 아이와는 달리 어린 시절의 가정 문제로 인한 외상적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 아이라고 나름의 상처와 두려움이 없을까? 과연 나는 아이에게 상처가 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감히 확신할 수 있을까? 외상은 비단 충격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의 어떤 태도와 말투가 아이에게 큰 아픔으로 다가갔을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인간의 성장에 있어 결여와 좌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단지 그런 사건이 큰 상처로 전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부모의 몫임을 기억할 뿐. 게다가 어떤 상황을 문제로 규정하는 순간 그 문제는 진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아이에게 각인시키지 않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실망했던 당시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혹시나 내가 그런 실수를 하진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결국 남겨진 것은 나의 초조함 뿐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유치원 친구들,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다른 친구들이 우리 아이를 많이 찾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스스로 관심을 갖고 한글과 셈 공부도 시작했고, 많은 것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단지 아직 감정 조절이 미숙해 제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울면서 난리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의사 표현이었고,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내 초조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아직까지 무언가를 의미있게 이루지 못했다는 막연한 불안감, 그렇다고 무엇을 반드시 이뤄야겠다는 목적의식도 불분명한데다, 그렇게 나이만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부쩍 늘면서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갉아 먹고 있는 지금의 상태를 말이다. 좋은 책들을 소개해주고 싶고, 삶에 적용해가는 고민들을 나누고 싶어 시작하게 된 글쓰기였지만, 이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겠다! 라는 목표와 연결되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래된 고민이었다. 물론 지치지 않고 꾸준히 가다보면 새로운 기회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은 분명히 갖고 있었지만, 순간 순간 다가오는 불안감과 조급함마저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아직까지 현실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니까. 이처럼 아이에게 품었던 불만은 결국 나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진취적인 삶의 태도 자체였다. 본래 자녀는 부모의 거울 (증상) 이고, 그런 자녀를 통해 자신이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모습 (실재) 을 마주하기 마련이니까. 앞으로 이 글을 언제 다시 보게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아이도,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모습을 추억하며 기분좋게 웃을 수 있도록 이 고민을 진지하게 부여잡고 최선을 다해 걸어가 봐야겠다.
그나저나 그 때 진심으로 달래주지 못해 미안해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