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키가 작은 편이다. 물론 많이 염려할 만큼은 아니지만, 원체 작게 태어난데다가 (2.69kg), 생후 2개월 때의 체격이 상위 70% 라는 병원에서의 설명이 아내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듯 싶다. 그나마 최근 평균 정도는 된다는 얘기를 들어 다행이긴 했지만, 고쳐지지 않는 식습관으로 인한 불안감은 여전했다.
또래 다른 아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의 경우 식사 시간에 두 세 숟가락을 연이어 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정말 좋아하는 면류나 피자, 또는 많이 배고픈 상태가 아니고서는 음식을 입에 넣기가 무섭게 자리를 떠나 노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즘은 쫓아 다니며 먹이지는 않게 됐지만, 그만큼 식사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표현할 때까지 최대한 기다려 주고, 함께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밥을 치우는 방법을 통해 식사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해주자는 제안은 번번히 뒤로 밀려났다. ‘그러다 정말 안 먹으면 어떡하냐’는 염려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행동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가 식사를 아예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고, 오히려 지금처럼 통하지 않는 방법을 계속 고수하는게 우리 모두를 지치게 만들거라고 이야기했지만, 불안한 엄마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약속 시간을 정하거나, 해찰이 과하다 싶을 때는 밥 그릇을 치우는 식으로 몇 차례 시도해 보긴 했지만, 주된 방식은 여전히 앉아서 먹자는 얘기를 수 차례 반복하(면서 지쳐가)는 잔소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몇 달 전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참고 글 : [50개월] 아이의 식사 습관 바로잡기)
1. 우리는 어쩌다 잔소리를 고수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어보고 싶은 점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잔소리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늘 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걸까? 꼰대라는 표현이 괜히 유행한게 아닌 것처럼, 이런 방식이 문제를 개선하기는 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려던 것도 하기 싫게 만드는, 그러니까 의지조차도 의무로 바꿔버리는 이런 마법의 문제 해결 방식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우리와 동행하고 있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떠오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① 가장 편리하고 익숙한 방식 (습관) 이라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② ‘언어를 통한’ 높은 수준의 설득 방식이라는 점, 마지막으로는 ③ 그 내용이 대체로 옳다고 여겨진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잔소리로 여기는 주장들은 대개 그 부분에서 만큼은 누가 들어도 옳은 내용인 경우가 많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반감이 들더라도 딱히 반박하기는 어렵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설명해 주는 양육 방식에 대한 믿음도 이런 관점에서 이뤄져 왔다. 반복적인 설명과 인내는 훈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고,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가 스스로 깨닫게 됐을 때 진정으로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있다는 믿음. 결국 상대가 동의할만한 내용을 폭력적이지 않게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2. 잔소리의 진짜 문제
이처럼 애초의 의도와 내용으로 봤을 때 분명 잔소리도 어느 시점 전까지는 의미있는 조언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언을 잔소리로 만드는 것 (정확히는 받아들이는 것) 이 아이라는 점이 상황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아이의 잦은 실수 앞에서 그 좋은 내용이 반복되면서, 약화되는 자극의 강도만큼 거부의 강도도 강해지기 때문이다. 어떤 메시지가 아무리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전달될 경우 처음의 감동은 무덤덤함을 넘어 지겨움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을 전하는 입장에서 더 좋은 방식을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된다. 결국 가장 가치있던 표현이 최악의 것으로 뒤바뀌어 버리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잔소리의 진정한 문제는 내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전달하는 태도, 즉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믿음에 기대 더 이상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서지 않는 우리의 나태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독서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모태 기독교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예수 이름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던 것에서, 정신분석의 경험과 서적들이 그 의미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던 곳 (히스테리 발작, 기타 신경증, 정신병 등) 에서 정신분석은 시작되었고, 한 세기를 지나는 동안 사랑의 방법에 대한 정교한 공식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저 덮어놓고 믿으면서 우연적 결과에 기대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연구 결과와 새로운 표현, 개념들이 뭉뚱그려진 채 비어있던 공간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사랑의 경험을 통해 믿음의 삶을 살게 되는 기독교의 은총 개념이 인간에게 있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이 인생에 단 한 명만 있어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40년에 걸친 카우아이섬 종단 연구의 결과는 이 원리를 잘 뒷받침 해준다. [1]) 심지어 그 사랑 때문에 신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었다는 전무후무한 가르침은 체념적 상태에 머물러 있던 인류 역사를 뒤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폴 틸리히의 설명이다). 다만 그 중요한 원리가 성경이라는 범주 내에서만 전달돼 왔다는 것, 앞서 이야기한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들이 교회에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외국어와의 대립이 아니고서는, 모국어의 가치를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신분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믿고 행해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왜곡될 수 있고 폭력적이며,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적 사랑의 한계와 이를 개선하기 위한 길을 열어 주었다. (참고 글 : 아이는 어떻게 부모의 증상이 되는 걸까?) 필자 역시도 그런 지식들과 상담의 언어화 과정을 통해 많이 회복될 수 있었고 말이다. 물론 목사님들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좋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지만, 아쉽게도 나의 경우에는 그 영향력이 의미있게 와닿지 못했다. 모태신앙의 비극이랄까, 그저 익숙한 이야기의 무한 반복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3. 기독교적 죄에 대하여
지난 주는 기독교의 핵심 절기 중 하나인 부활절로, 덕분에 ‘죄’의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코로나 상황에서 많은 교회들이 논란의 중심에 선 것에 대해서는 같은 개신교인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ㅜ). 예수 이름을 믿는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엇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이 와닿지 않는 정의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도덕적으로 사소한 죄, 또는 죄악된 생각을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죄인일 수 밖에 없다고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에 머물러서는 죄라는 것이 도무지 나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겨우 그 정도 죄 때문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점이 전혀 감동으로 (은혜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감동은 정말로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순간에, 예기치 못한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을 때 (구원) 찾아온다. 알랭 바디우가 ‘사건’이라고 일컫는 것, 그러니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변증적) 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리와 우연히 맞닥뜨리는 순간 (반변증적) 을 통해서 말이다. 이 때 죄라고 하는 것은 이런 우연적 사건이 가능함을 믿지 않는 (이성적 한계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뜻한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통해 반복의 자동성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여겼던 유대인,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 그런 상태의 극단을 잘 보여준다.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율법의 목적은, 수많은 조항들을 빠짐없이 지켜온 그들의 완벽에 가까운 복종으로 인해 현실화 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낸 그들이 보여준 삶의 태도는 오만함 그 자체였다. 행위에만 집중하다 정작 그 이유를 잊어버린 것이다.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 결국 스스로의 삶에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법에 의해 완벽하게 종속된 상태 (죄 가운데 빠진 상태) 라는 점을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자 (예수) 를 기어코 죽이고야 말았다. 이 사건이 결코 ‘그들의 기록’ 일수만은 없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합리적 사고의 틀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4. 언제나 배움에 열린 태도를 지켜나갈 수 있길
어쩌면 꼰대란 바로 이런 태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만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부분보다 모르는 부분이 훨씬 더 많고, 따라서 언제나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외의 길이란 존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정한 생각의 틀에 묶여 제한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 인간은 어느 정도 한계에 머무를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꼰대스러움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 일컬었던 바리새인,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의 부활 사건을 믿는 믿음이란 바로 이런 한계를 과감히 벗어나기로 결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으로 도무지 새로운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이 분명히 ‘가능할 수도 있음’을 믿음으로써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게 되는 것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잔소리로 돌아가 보자면, 우리는 분명히 언제나 아이들에게 의미있는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마 우리가 그런 방법들을 찾아나서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경종을 울려주지 않을까? (휴..) 결국 이런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좋은 방법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늘 염두하는 ① 배움에 열린 태도와, ② 우연한 기회를 만날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 (필자의 경우 독서) 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또 어쩌면 평생토록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고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겠지만, 의미있는 조언이 어느 순간 잔소리로 돌변하지 않도록 날마다 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고정된 삶에 머무르지 않고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야말로 이성적 한계로 인한 죄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는 길임을 늘 기억할 수 있기를. 그렇게 작은 도전부터 즐겁게 시도함으로써 흐르는 조언으로 우리 가족에게 활력을 더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1] 김주환, 『회복탄력성』, p.p. 47-48, 58
연구자들은 1955년에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해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카우아이 섬이 연구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열악한 사회경제적 환경 때문이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겪을 수 있는 불운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카우아이 섬이었다. 그리고 그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그 섬에 산다. 인구유동이 적은 이 섬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닫힌 세상이었다…. 이 아이들이 30세가 넘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연구는 계속 되었으며, 무려 90%에 가까운 698명이 조사 대상으로 끝까지 남았다. 종단연구에서 장기간에 걸쳐 이렇게까지 높은 잔존률을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관계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할아버지,삼촌,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 말대로,사람은 결국 사랑을 먹고 산다는 것이 카우아이 섬 연구의 결론이다. 아이는 사랑 없이 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을 먹고 자라야 아이는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아존중심을 길러가며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복탄력성의 근본임을 카우아이 섬 연구는 알려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