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개월] 동생을 질투하는 언니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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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은 아이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서글픈 울음 소리가 다른 방에 있던 나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의 울음은 제법 오랜 시간 이어졌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아 방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읽고 있던 책을 보여주며 “이 부분을 보다가 갑자기 그런다”고 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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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눈물짓게 했던 장면 (출처 : 『내 잘못이에요』, p. 19)

감정 표현을 다루고 있는 책이었는데, 벽에 낙서를 하게 된 아이가 혼날까봐 그 사실을 숨기고 불편한 마음으로 엄마를 대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후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되지만, 우리 아이의 경우 엄마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 많이 공감이 됐던 모양이었다.

1. 사랑을 지키고 싶었던 아이의 투쟁

안그래도 앞으로 태어날 동생을 두고 엄마 아빠와 한창 갈등을 겪는 요즘이긴 했다. (참고로 이 일은 4월 20일에 일어났고, 둘째는 26일 아침에 건강하게 태어났다. 한 마디로 게을러서 글쓰기가 많이 늦어졌단 소리다. ^^;) 아이의 질투는 엄마 배가 불러오면서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 갔는데, 아무래도 독차지했던 사랑을 나눠 가질 (빼앗길) 때가 머지 않았음을 직감했기 때문인 듯 싶었다.

“엄마, 아빠는 나만 혼내고, 나무 (동생 태명) 만 예뻐해!”

모든 조언을 혼낸다고 받아들여 왔던 것을 넘어, 언급한 적도 없는 동생을 걸고 넘어진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무한테는 이야기 한 적이 없고, 혼내는 게 아니라 알려주는 거라며 앵무새처럼 반복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라고 하지나 않을지. 심지어 얼마 전에는 나무를 쓰레기통에 버렸으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해 우리를 놀라게 했는데, 다행히 스스로도 그 표현이 많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던지 두 번 다시 얘기하진 않았다.

한편 아이의 상실감은 신체적으로도 표현 됐는데, 어느 때부턴가 길거리에 주저 않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다. 유치원에서도 아이가 힘이 없는 것 같다는 얘길 몇 차례 들었지만, 병에 걸렸다거나, 힘 자체가 부족한 것도 아니어서 (막상 놀이터에 가기만 하면 몸놀림이..) 관심과 사랑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임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병원에 데려갈까 물었던 아내의 의견에 펄쩍 뛰었던 이유다). 그렇게 밥을 먹고 산책을 갈 때도, 돌아올 때도 아이는 몇 번이나 힘 없이 주저 앉으며 무언가에 걸렸다고 변명을 했다. 이런 상황이 참 난감한 것은 아이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줄수도,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나약한 모습을 보여 관심을 끄는데 성공해 증상에 머물거나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상상 속 아픔을 실제로 경험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저 왜 자꾸 넘어지느냐고 물으며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우리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밖에도 갓난 아기 흉내를 내며 기어 다니거나, 스스로를 아기라고 불러달라면서 발음을 미숙하게 하고 안겨 있거나, 동생 침대에 들어가 누워 있는 등 상상할 수 있는 ‘퇴행’ 행동들을 모두 끌어모아 엄마, 아빠의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 요즘 우리 아이가 불안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2. 불만이 가득했던 하루

아이가 책을 보며 울었던 당일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치원에서는 친구 여자 아이가 소변을 보면서 문을 잠그지 않아 우리 아이와 다른 남자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 아이를 울렸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그렇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했고, 평소 같았으면 삐지거나 울었을 아이가 2분 가량 있다가 친구에게 다가가 사과를 했다고 한다. 자기가 왜 그렇게 하게 됐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그렇게 사과를 받은 아이도 마음이 풀어져 화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한껏 칭찬해 주었다. 이후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는 예정일이 다 되어가도록 산통이 없던 아내가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언니가 나무를 싫어해서 뱃속에서 안나오려고 하나봐.”

아이는 순간 놀랐던지 아니라고 하면서 엄마를 따라 “나무야 빨리 나와” 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자기 딴에도 동생을 보고 싶은 마음과 사랑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갈등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기분만 좋다면야 그런 고민 쯤 가볍게 번복할 수 있는 천상 아이긴 했다.

마지막 이벤트는 샤워 시간과 함께 찾아왔다. 집에 도착한 뒤 엄마와 샤워를 하면서 말을 어지간히도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제발 하지 않아줬으면 하는 행동들을 더 재미있어 해 화를 돋구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내의 깊은 한숨을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후 로션을 바를 때나, 머리를 말릴 때에도 조금만 아프거나 머리가 헝클어진다 싶으면 여지 없이 울면서 짜증을 내는 상황이 벌어져, 결국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나마 아이의 울음이 오래 지속되진 않았지만 자리를 벗어난 덕분에 겨우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3. 아이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 보자면

그 날의 책 읽기는 이처럼 다사다난했던 (?)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갖게 된 시간이었다. 우연인지 의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한 책 선정을 통해 아이의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는 것과, 책 속의 엄마 덕분에 그 마음을 마음껏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 책이 아니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텐데, 아이가 어느새 부쩍 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정말 슬프게, 눈물을 끅끅 삼켜가며 우는 모습은, 마치 자기도 모르게 했던 행동들로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던 지도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형제들의 나이 차는 최소한 4년 가량은 나야 한다고 한다. 이보다 적은 차이로 동생을 경험한 손윗 형제의 상실감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과, 본인도 당시에는 그런 점을 잘 몰라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는 아쉬움이 함께 공유되곤 했었다. 동생을 조금 늦게 (5살 터울) 갖게 된 것은 첫째만 키우기도 힘들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조금이나마 첫째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던 마음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첫째가 둘째를 질투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 년간 독차지했던 사랑을 빼앗긴다는 건 그것이 네 살이든 다섯 살이든 똑같이 힘들게 다가갈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 큰 어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고작 몇 년 밖에 살아보지 못한 아이가 겪을 고통의 크기를 우리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부모 없이는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이의 입장에서 그런 사랑을 잃는다는 건, 사실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맞먹는 고통일 수 있지 않을까?

아이의 앞선 행동들을 최대한 감내하고자 애썼던 것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는 이런 상실의 아픔을 그저 최대한 표현하고, 풀어내면서 스스로 극복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혹여나 우리의 잘못된 반응으로 인해 솔직한 감정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여겨져 왜곡되거나 섣불리 억압되지 않도록, 그렇게 잘못 경험된 감정의 기억들이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와 아이를 지속적으로 괴롭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지독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도 왜곡된 감정의 분출이 이유인 경우가 참 많은 듯 싶다). 여전히 나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있지만, 내가 겪었던 고통의 그림자를 아이가 뒤따라 밟지 않고 자신이 의미를 두는 무언가에 온 마음을 쏟아낼 수 있다면 지금의 시간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 준 것이라 믿는다. (그치만 조금만 더 빨리 지나가 보자. ^^;) 아이가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 때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무언가에 매진하고 있을 첫째, 그런 언니를 뒤따르고 있을 동생과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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