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아이는 최근에 배운 ‘개굴개굴 개구리’ 동요를 따라 부르고 있었는데, 몇 차례 반복하더니 노래를 멈추게 하고는 혼자 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리 길지 않은 노래여서 다 외웠나보다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엉뚱한 가사가 들려왔다. 첫 번째 파트인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이 소절을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이라고 불렀던 것. 나는 장난스럽게,
“땡~!”
하고 알려주고는 어느 부분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이는 잠시 고민해 보더니 잘 모르겠다며 얼버무렸고, 나는 뒷 소절을 먼저 불렀다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별 대답이 없었지만, 이렇다 할 표현도 없어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 되는 듯 보였다.
1. 아이가 토라졌던 이유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물었던 ‘만차’와 ‘차가 많다’의 차이를 알려주려고 다시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아이는 문가에 몸을 바짝 붙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빠와 거리를 둘거라는 무언의 항의 같은 그 모습이 한편으로 귀여우면서도 아차 싶어 곧바로 물어보았다.
“왜? 아빠가 틀렸다고 해서 삐졌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아빠가 틀렸다고 해서 아빠랑 안놀거야!”
“아, 그랬구나. 그치, 틀렸다고 하면 기분 나쁘지. 근데 잘못된 부분에 대해 알려주는 건 필요하지 않을까?”
“싫어!”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네가 기분 나쁜 걸 얘기할 수 있는 것처럼, 아빠도 잘못한 부분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빠는 잘못한거 알려주는거 좋던데. 그래야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그런 부분들 고쳐 나가면서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잖아.”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럼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엄마, 아빠가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잘못 알고 있는 상태에서 행동하다 보면 나중에는 친구들이 이상하다고 얘기할 것 같은데, 그럼 앞으로 틀려도 알려주지 않는게 좋겠어?”
“아니, 아빠가 틀렸다고 놀려서 싫어.”
친구들을 언급하니 생각이 조금 바뀐 모양이었다.
“아, 아빠가 잘못됐다고 지적한게 기분 나빴던게 아니라 땡! 하고 놀리는 말투로 이야기해서 싫었던 거야?”
“응.”
평소에 지적을 받기만 해도 토라지고 기분 나빠해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기 딴에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당시엔 느끼지 못했는데 글을 쓰면서 곱씹어 보니 아이가 충분히 기분 나쁠만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 싫다고 했다가, 아빠의 설명을 들어보니 잘못된 것을 알려주는 것까지 거부하면 더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듯 싶다 (안그래도 요즘들어 부끄러움이 부쩍 많아지신 공주님이다). 필요한 건 알겠어서 마냥 거부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속상한 감정을 거저 내려놓을 수도 없어 선택한 아이 나름의 합리적인 방법이었던 셈이다.
2. 어른들의 현주소
생각해 보면 지난 번 글 (참고 글 : 언니의 서투른 애정 표현) 이 실수의 좌절감에 압도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노력을 통해 배운 것, 잘한 것이 반드시 있음을 아는 것) 이었다면, 이번에는 불편한 감정에 압도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긍정적인 면을 섣불리 배제하지 않는 것) 이 담겨 있었다. 모두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긍정적인 의미마저 배제시켜 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바람만 그럴 뿐 (불편한) 감정과 (잘못됐다는) 사실을 나눠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은 결코 쉽게 획득할 수 있는게 아니긴 하다. 아니, 언제까지고 갖게 될 수 있긴 한 걸까?
한편으로 그 중요성이 요즘의 한국 사회만큼 커진 경우가 있을까 싶은데, 사실 관계를 압도해 버린 감정의 분출이 곳곳에서 눈에 띄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 특유의 억압 문화가 불러온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로,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분명 감정은 우리 삶의 동기를 결정 짓는 (나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고, 그것이 어떻게든 표현되고 수용될 수 있어야만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할 수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 있게 된다. 따라서 매우 당연하게도 감정적 분노의 표출은 충분히 존중 되어야 하며, 그 표현이 과하면 과할수록 이런 억압에 일조한 구성원들이 더 큰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 문제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감정 – 개인의 환상, 욕망, 트라우마의 집결체임과 동시에 상황을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어 현실을 왜곡해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 의 한계상 객관적인 사실의 보완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자유보다 중요한 것이 평등이라고 역설했던 바디우의 주장 (참고글 : 자유와 평등의 모순에 대한 바디우식 해결 방법) 처럼, 감정 표현의 자유란 보편적 평등의 틀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장해야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정의 중요성을 무시한 채 효율성과 합리성으로 억눌러 온 근대의 역사는 분명 저물어가고 있지만, 억눌린 감정의 파도를 감당할만한 진실의 그릇을 준비해두지 못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한국 어른들의 현주소이지 않을까?
3.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갈등의 골을 안전하게 봉합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길 바라고, 우리 사회의 역량을 봤을 때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다만 이런 큰 흐름과 더불어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아이들부터 이런 어려움을 잘 풀어나갈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의미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정 표현을 충분히 하면서도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도록,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 삶을 의미있게 확장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학습 (배운 것을 적용하는 것) 을 통한 성장의 연속임을 생각해 본다면, 아이의 작은 경험들은 도래할 더 큰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작지만 큰 상징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편 그렇게 아이의 마음을 알게된 후, 아빠의 다짐을 이야기하자 아이는 비로소 서운한 감정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알겠어. 아빠가 그럼 앞으로는 잘못됐다고 얘기할 때 놀리는 투로 얘기하지 않도록 조심할게.”
“응~! 나 이제 아빠랑만 놀거야!”
“응? 그래도 엄마랑 같이 놀자.”
“싫어, 아빠랑만 놀거야.”
“그, 그래. 재밌게 놀자~”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