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개월] 아이를 대할 때마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 (feat. 성취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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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여자아이들

요즘 첫째의 육아 난이도가 부쩍 높아졌다. 한 두 번 말을 했을 때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긴 하지만, 동생 때문에 그런건지 아이와 함께하는게 확실히 더 힘들어졌다. 어찌나 청개구리 같은지 얼마 전에는 아내가 진심으로 화가 나 외치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연애 시기까지 통틀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평소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경우가 많았던 엄마의 내면을 깨우는 그 어려운 일을 우리 아이가 해낸 것이다.

다만 순간적으로 관심이 갔음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던 것은, 요즘 아이의 태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다거나, 사사건건 말썽을 피우는게 아니라는 점에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기 생각과 주장이 날로 선명해지면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충돌, 얄미운 6살 언니를 마주하는 우리의 일상이었다.

1. 아이에 대한 고민

사실 생각해보면 아이와 부모의 입장이 충돌하는 경우 아이의 연령상 대부분 어른들의 입장이 옳기 마련이고, 이 때문에 우리 의견에 따라줘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해의 폭과 충동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한 번에 알아듣는 경우도, 설령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드문 것이 늘 문제가 된다. 아이의 깨달음과 행동의 변화가 언제 도래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설명하기 지치는 때는 갈수록 자주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아들을 법도 한데 도무지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한 야속함, 어린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지 않을까?

그래도 이 정도의 어려움만 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아 보겠는데, 급변하는 환경이라는 것이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자녀가 자율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부모는 없겠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에서 믿음과 기다림이라고 하는 핵심 가치의 실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공 방정식은 매력을 잃어가고 있고, 기술의 발전이 미래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도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야말로 어른들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마당에 어린 자녀가 그 어려운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지금 아이의 모습을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보니 걱정부터 앞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남는 건 사람 밖에 없는 (경쟁적인) 나라에서 어떻게든 빠르고, 성공적으로 앞서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이겨낼 방법이 딱히 없는 것이다. 학원을 안보내고 싶지만 그래봐야 놀 친구도 없고, 남들은 앞서가고 있다는 불안감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게 되는 것처럼, 최대한 기다려주고 싶지만 마냥 그럴수도 없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인 입장에서, 그나마 책을 읽고 글로 풀어내는 가운데 몇 가지 지침이 되어준 내용들은 있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떠올라 충동적인 행동을 ‘덜’할 수 있도록 붙잡아 준 기표 말이다. 물론 언제나 생각이 쉽지 주로 실천하지 못하고 반성하는 용도로 소환되긴 했지만, 적어도 판단의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만큼은 적잖은 도움이 되었던 듯 싶다.

2. 모든 것에는 명암이 공존한다 (모든 대상의 가치는 중립적이다)

생각해보면 삶에서의 어떤 선택이 전적으로 좋거나 나쁜 경우는 거의 없는 듯 싶다. 부정적인 면이 있으면 비슷한 정도로 긍정적인 면이 함께 있어 둘 사이의 어딘가를 두고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는 어느 한 쪽 성향에 감정이 치우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 적절한 해석이 따라오는 것을 종종 경험하곤 했다. 감정 소모가 극심한 육아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둘째는 첫째 때와 달리 등센서가 예민해서 한동안 고생을 했다. 품에 안겨 잠든지가 제법 되었음에도 눕히기만 하면 깨어 우는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즘은 밤에 깨지 않고 자는 경우가 늘어나 한결 나아졌지만, 새벽 수유를 두 세 차례 해야했던 시기의 아내의 고통은 필자가 쉽게 언급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좀처럼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아이의 요구 탓에 어느날 아내는 ‘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아내의 힘듦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문득 떠올랐던 생각은 예민함의 가치였다. 아이를 내려놓을 때마다 운다는 것은 흔히 얘기하는 분리불안일 수도 있겠지만, 정반대로 안겨있을 때의 품이 그만큼 포근하다는 반증일수도 있다. 물론 아이를 향한 아내의 민감도로 봤을 때 후자 쪽이 맞을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아이가 첫째 때보다 민감하다’는 것 뿐이었다. 아무래도 예민함이라는게 주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 본인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 염려가 먼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어떤 결과에는 세심한 것까지 놓치지 않았던 디테일이 숨겨져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미세한 차이를 섬세하게 감지해내는 예민함이 없다면 놓칠 수 밖에 없는, 그런 능력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차이 말이다. 따라서 아이의 요구를 받아주는 것이 당장은 힘들겠지만, 이 시기를 잘 감당함으로써 아이의 감각을 세워줄 수 있다면 앞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갈 때 중요한 자질을 갖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게 되었고,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주었다.

한 때 스스로를 옹알이, 진지충이라 불렀던 때가 있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만 (염려만) 잘하는 것 같아 붙였던 자기혐오적 표현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지 않은 친구를 동경하며 나를 바꾸고 싶어하고 괴로워 했지만, 이런 성격이 깊이있는 책들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또한 그 고통 만큼의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향한 자부심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반드시 예외적인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에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증상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라봤던 것에서, 말년에 이르러 극단적인 어려움을 감당해 낸 성공적인 주체화라고 자신의 생각을 뒤집었던 라캉처럼 말이다. (참고글 : 탐구를 한다면 라캉처럼) 나의 선택이 옳다고 여기는 확신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 길만이 유일한 것이 아님 또한 인정하는 것, 모든 것의 명암을 바라보는 습관은 이런 경험을 통해 등장할 수 있었다. 긍정의 힘이란 자신의 가치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실재적인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3. 배움에 대한 진심은 감동의 크기가 결정한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비하하며 삶을 견뎌냈던 필자에게는 의미있는 성장이 절실했다. 하지만 업무 관련 세미나도 찾아 다녀보고, 주어지는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배우며 성장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장 눈에 띄는 결과를 얻을 순 없었다. 자연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고, 이 길이 적성에 맞는지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30대가 되면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정말 우연한 계기로 정신분석 관련 책들을 접하게 되고, 감정적인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게 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왔다. 어린 시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던 분노, 불안, 강박 등의 증상들은, 책을 통한 원인, 해법들과 공명하며 서서히 안정감을 찾아갔다. 물론 오랜 기간이 필요했고 다른 변수들도 있었지만, 진정한 지식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된 것은 바로 은혜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필자의 이런 경험들 덕분이었다. 이 블로그의 모든 글들은 그런 개인적인 감동의 흔적들이자, 성장의 기록들이다. 배움은 정말 즐겁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에 대한 진심은 주체적인 감동의 크기가 결정한다는 이런 확신은 아이가 누릴 성취의 기쁨을 앗아가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게 끔 이끌어 주었다. 부모가 나서서 자신만의 정답을 가르쳐주거나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아이가 발견한 것을 같이 기뻐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것만으로는 아이의 성장을 견인할 수 없다. 우리가 늘 뛰어난 사람이나 성장하는 사람 곁에 있을 때 좋은 자극을 받아 도전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아이가 호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중요한 몫이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빠를 공부쟁이라 불렀던 첫째의 표현이 기쁨으로 기억됐던 것도, 다른 것보다 아이 스스로 글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던 것도 모두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윤아일기
아이의 첫 일기, “글자들도 모두 웃고있는 거야?” 라는 나의 질문에 “응 글자들도 바닷가에 왔어.” 라며 즐겁게 대답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상대적인 속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오직 아이가 얼마나 자율적으로 성취한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에만 관심을 가질 생각이다. 사실 그건 아이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삶의 이유라는 물음표 앞에서 그 답을 찾아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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