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개월] 빼앗겼다는 표현에 분노한 이유

readelight

상실감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경기에 참여한 차민규, 김준호 선수를 두고 응원을 펼치던 중, 3위에 랭크됐던 김준호 선수의 기록이 깨지자 첫째가 갑자기 짜증 난다며 방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스러웠던 나는 곧 따라 들어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이는 눈을 흘겨 뜨고 곁에 있던 물건들을 (가볍게) 바닥에 던졌다. 뭐 하는 거냐며 가볍게 타박을 주고는 다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엄마가 메달을 빼앗겼다 그래서 그랬다’며 울먹였다. 그래 평소에도 지는 걸 싫어하긴 했으니 그럴 수 있었겠다 싶어 위로해 주면서 마음이 풀리면 나오라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생각해보면 지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있나 싶기도 한데, 인상적이었던 아이의 반응에는 깊은 곳과 연결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싶어 한 번쯤 짚어보고 싶었다.

1. 우리가 비교의식을 심어준 건 아니었을까?

혹시 우리의 어떤 반응이 아이가 지는 것을 싫어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 봤다. 그래도 가정 안에서만큼은 비교의식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기 때문에 아이에게 상처를 줄 만한 실수를 한 기억은 없었다. 물론 비교가 일상화 된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 부부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은연중에 실수한 부분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소하게 이런 경우는 있었다. 입이 짧아 식사 때마다 딴청을 피우며 스트레스를 주는 아이에게 자극을 준답시고 ‘다른 친구들보다 작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핀잔을 줬던 일이라든지, 외할아버지가 먹깨비인 둘째를 보면서 (첫째보고 들으라는 투로) 둘째가 더 크겠다고 이야기하셨던 일 등이다. 그래도 그런 표현을 반복 했다거나, 강한 감정을 실어 전달했던 것은 아니어서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던 듯싶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다른 친구들이 자기보다 잘하는 것들에 대해 편안하게, 심지어 자랑하듯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다행스럽게 여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이런 경우도 있었다. 반에서 너보다 큰 친구가 몇 명 있냐고 물었더니 한 명 한 명 이름을 대기 시작하길래, 반대로 물었더니 1명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부부는 그 말을 듣고 빵 터졌는데 아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 (다음 장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보통 무언가 감추고 싶은 부분을 들춰내거나 웃으면 예외 없이 삐진다) 웃는 중에도 안심이 됐다.

사실 사회로 나가게 되면 비교를 통한 가치 판단 (경쟁력) 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가정 안에서만큼은 주체적인 선택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길. 그리고 비교 우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의 허무함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그저 스스로 진실한 삶을 묵묵히 살아나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2. 아이의 기를 너무 세워줘서였을까?

사실 아이가 지는 것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비교의식보다는 자존감을 키워줄 수 있도록 독려했던 것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① 적어도 3살까지는 원하는 것을 전적으로, 또 민감하게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 (전능 경험) 과, ②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가장 힘든 방법 (반복된 설명으로 훈육하는 것) 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칫 아이의 자기애만 키운 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이런 양육 방식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었지만, 너무 힘든 것이 문제였다. 아이가 6살 (만 4세) 이었던 작년이 특히 그랬는데, 어찌나 말을 안 듣던지 ‘우리가 잘못 키웠나’에 대한 고민을 매일 같이 토로할 정도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릴 때 사람들 앞에 나가서 그렇게 춤도 잘 추고 하던 아이가 유치원 2년 차 (6살) 정도부터 부쩍 부끄러움을 많이 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아이를 잘 세워주고 공감해주면 이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해 왔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얼굴을 잘 아는 어른들에게도 부끄럽다며 아는 척도 하지 않아 민망함에 타일러도 보고 윽박질러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최근 들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거기에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춤을 잘 춰서 선생님이 앞으로 불러내 아이들에게 잘 보고 따라 하라고 하기도 했다는데, 정작 자리를 깔아주면 부끄러워하며 그 오랜 연습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부끄러움과 관련된 기억 조각들은 더 있었다. 아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 알려주면 혼낸다며 삐지는 통에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진땀을 뺀다거나, 우리가 귀여워서 웃어도 자기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해 눈을 흘기는 것이 그런 경우였다. 이런 마음이 극적으로 드러났던 사건이 4살 정도에 있었다. 아이가 시소를 타고 내려가는데, 옆에서 시소를 타고 있던 부부가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너무 예쁘다며 웃자 갑자기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이의 잘못을 알려주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끄러움의 싹이 움텄던 게 아닐까 싶다. 마냥 받아주기만 했던 시기에서 벗어나, 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 그리고 잘못한 것들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되면서, 하지만 아직은 그 적용이 미숙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더 크게 부각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게다가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은 아이가 커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아지고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판단하는 심판관이 점차 내면화되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매우 현실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아이가 새롭게 깨달아야 할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두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이전의 환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부각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시도해 볼 수 있도록 독려해 주는 것. 이를 토대로 내면화 된 규율을 이기고 더욱 확신에 찬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끈기라는 것은 결국, 이 과정이 반복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근육일 것이기 때문이다.

3. 오히려 단어 자체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을까?

기는 세워주고, 비교의식은 갖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러니까 나는 정말 잘했는데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여기는 자기애적 분노였을까? 그런 결론에 머물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다. 아이의 분노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의 반응을 계속 곱씹어보던 중에 불현듯 떠올랐던 것은 ‘빼앗김’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내가 만약 ‘김준호 선수가 메달을 못 받게 됐어’ 라고 표현했다면, 아이는 그때와 같은 분노를 경험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오히려 빼앗김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이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건드렸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게 된 순간이었다.

빼앗김이라는 단어가 아이의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라면, 앞선 고민에 더해 곱씹어 볼 만한 – 분명한 상처로 경험되었을 만한 – 사건들이 더 있었다. 첫 번째는 엄마의 복직에 따른 상실감이었다. 14개월 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에는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엑셀에 기록해두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아이만 데리고 대구 친정으로 3일간인가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아이는 우리와 며칠간 떨어져 있었어도 울지 않았고, 다시 만나서도 크게 반가워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리고 엄마가 애정표현을 해도 받아주지 않고 자꾸 때린다거나,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불러도 아빠에게만 오는 등 당시에는 엄마와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나 싶어 일부러 아이와 거리를 두기도 했었다. 그때가 2017년 11월이었는데, 아내가 복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당시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여기는,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엄마를 빼앗겼다고 여기는 상실감에 분노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돌이 갓 지났던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마침 그때 써놨던 일기가 있어 글이 많이 길어졌지만.. 전체 내용을 인용해 본다.

171114 아이의 첫애도

오늘은 한 가지 수수께끼를 푼 날이다. ‘아이가 왜 엄마에게 못되게 굴까?’ 에 대한.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새벽 (5시가 채 되지 못한)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엄마 (참고로 아내는 간호사다). 화장대에 불이 켜져 있기도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전 날에도 10시 반이 넘어서 잠들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똘망 똘망한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며 웃음 지었다. 엄마도 함께 미소지었고, 곧이어 아이는 엄마에게 손을 뻗으며 안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엄마는 곧바로 다가와 아이를 안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스르륵 자리에 다시 눕혀줬다. 그렇게 잠이 들었나 싶더니 곧 다시 일어나 아빠를 바라보고 ‘씨익’ 웃으며 엄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만의 요청 소리(“응~ 응~.”)를 내며 다시 안아 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보며 나는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다시 한 번 아이를 안아줬고 곧 출근을 해야했기에 오래 안지는 못하고 아이를 달래며 다시 자리에 눕혔다. 그렇게 엄마는 주방으로 나가 빵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밖으로 나가겠다고 낑낑댔다. 그렇게 아빠와 함께 거실로 나와 우유를 마시면서 엄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

“엄마 다녀올게. 안녕~.”

아이도 손을 흔들며 배웅한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누웠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안아달라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다시 아이를 안고 도닥여 준 후 다시 눕혔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거실로 나왔을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통에 할머니도 아이를 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번 가량 안아주고 눕히고를 반복했을까, 엎드려 있던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거실로 데리고 나오자 잠시 울음을 그치는 듯 했다. 하지만 ‘가볍게 칭얼대는거였나’라고 안심하기 무섭게 자지러질 듯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게 아닌가? 마치 폭포수처럼 쉼 없이 소리를 지르며 우는 아이를 보며 나도 당황스러웠지만,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아이가 ‘잠을 잘 못자서 그런가’, ‘아니면 감기 기운이 있나’ 하면서 달래주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 쉴 새 없이, 정말 정말 서럽게 울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얼마나 나이 답지 않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었는지를. 그동안 아이가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던 모습들이, 서운해 하는 엄마의 표정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아이가 겪었을 아픔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아무 것도 아이를 달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아이의 아픔에 말 없이 동참할 따름이었다. 순간순간 핑크퐁 영상이 떠올랐지만 지금의 아이에게 있어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눈물만 삼켰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나자 보다 못한 할머니는 엄마와 영상 통화를 시도했고, 엄마를 바라보면서 아이는 계속해서 울음을 이어갔다. 사실상 엄마가 곁에 있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통화하기 전보다 더욱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모습에 자리를 벗어날 수 밖에 없었고, 어쩔줄 몰라 서성이다가, 여전히 울면서 현관을 가리키는 아이를 달래며 겉옷만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새벽의 어두움은 가시기 전이었고, 아파트 단지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잠깐동안 아이와 대화를 나눴다.

“아빠는 네가 그렇게 힘든지 잘 몰랐네. 엄마한테 심통 부리고 안기지 않으려고 해서 걱정했는데 사실은 엄마 보고 싶어서 그랬던거구나?” “응.” 훌쩍거리는 중에도 대답을 잊지 않는다.

“에구 그랬구나. 엄마도 같이 있고 싶은데 일하러 가야 해서 그러지 못하는 거야. 엄마 이해해 주세요. 엄마 사랑하지?” “응.” 기특한 생각에 등을 도닥여 주며 걸음을 이어갔고 비로소 마음을 추스른 아이는 나무를 바라보며 반갑게 손짓했다.

“아이고 춥겠다. 우리 이제 그만 들어갈까?” “응.”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잠시 안고 있다 자리에 눕히자 고단한 듯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아직까지 훌쩍거리고는 있지만 (일기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슬픈 감정에 대한 처리는 잘 마무리 지은 것 같았다.

엎드려 있는 아이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스친다.

어쩌면 아이에게 있어 빼앗김이란, 뼈에 사무치는 무언가는 아니었을까. 사실 빼앗김에 대한 다른 사례로 둘째의 탄생, 그러니까 엄마, 아빠를 빼앗겼다고 여기고 동생만 예뻐한다며 벌여왔던 투쟁의 역사도 있었지만 앞서 소환한 글을 보고는 더 이상 어떤 설명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분노 속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졌던 이유, 어쩌면 오랜 기간 아이를 괴롭혀 왔을 외로움을 마음으로 위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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