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의 구역모임은 ‘마음 맞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쌓여왔던 갈등 해소의 실마리를 찾게 되면서, 정말 오랜만에 상담을 마치고 나왔을 때의 기분이 들었다.
1. 악화 중이던 첫째와의 갈등
최근들어 부쩍 심화되고 있는 갈등은 ‘언니의 질투에서 비롯된 다툼’이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동생이 갖고 놀고 있으면 자기거라며 빼앗거나, 자기 물건이 아니라면 하고 싶다고 칭얼대다가 결과적으로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울고야 마는 식이다. 참고로 첫째는 9살(초2), 둘째는 4살(37개월)인데, 둘째도 마냥 고분고분하진 않다 보니 우리 부부는 늘 중재하느라 바쁘다. 보통 둘째가 장난감을 빼앗기면 “돌려줘라고!”라고 울부짖는데, 최근에는 “내가 먼저 갖고 놀고 있었잖아!”라고 나름 합리적으로 항의해도 결코 통하는 법이 없다. 결국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제지를 당하거나, 대부분 언니가 혼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첫째가 주의를 받거나 꾸중을 듣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면 좋겠는데, 억울한 마음을 풀려고 하면서 갈등을 키웠기 때문이다. 내 것을 동생이 마음대로 가져갔다거나, 동생이 먼저 때리거나 꼬집었는데 왜 나만 혼내냐는 것이 주 이유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적당히 타이르면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억울함을 직접적으로 풀려고 하는 것(복수)까지 받아주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대놓고 괴롭히면 혼날 게 뻔하니 ’복수를 유발하도록‘ 수를 쓰는데, 괜히 근처에서 방해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어 동생이 하지 말라고 밀치거나 팔을 휘두르면 이를 빌미로 되갚아 자기 감정을 푸는 식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면 동생이 먼저 그랬다는 핑계를 대니, 그 과정을 지켜봤던 우리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절로 내쉬게 된다. 이 정도가 되면 언성도 자연히 높아지는데,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 꼬박꼬박 (우리보다 더 큰 소리로) 말대꾸를 해 결국 “버르장머리 없이!”라는 말을 내뱉고 만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지난 주말에는 동생을 ’죽이고 싶다‘는 표현까지 해 한바탕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고 말았다.
처음에는 이성 부모로서 공포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아내를 무시하듯 대드는 모습을 번번이 목격하게 되면서 점차 주의는 꾸중으로, 야단으로 강화되어 갔다. 세상에 나가 꼭 필요한 공격성을 키워주고자 받아준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이 때문에 아내는 종종 어릴 때 잡았어야 했다고 이야기했고, 우리가 힘든 만큼 잘 자라줄거라며 다독였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여전히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감정은 회복되기 전에 계속 나빠져만 갔다. 굴레가 되어버린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남아있는 선택지는 감정을 차단하는 일 뿐이었다. 좋게 좋게 타이르다 분노해 상처만 주고 받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네 마음대로 살다 빨리 커서 나가줬으면’ 하는 게 요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2. 우리 부부가 놓치고 있었던 것
구역모임은 바로 이런 마음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 날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갈등 상황이 재현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문제로 넘어갔는데, 갈등 패턴을 설명하자 모두들 어렵다며 공감을 표했다. 4, 5학년 연년생 자녀를 둔 엄마(구역장님)는 조금만 더 크면 나아질거라고 조심스럽게 다독여 주었다. 물론 기다리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어 수긍했지만, 대체 그 때가 언제일지, 버텨내는 것 자체가 힘들어 한숨이 나왔다.
첫째가 사랑을 덜 받았다고 느끼는 것 아니냐는 질문은 우리 입장에서 가장 억울한 부분이었다. 한동안 혼자였어서 동생보다 더 많은 시간과 사랑을 듬뿍 받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오랫동안 사랑을 독차지하다 동생에게 빼앗기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동생이 태어나기 전 첫째가 겪었던 증상들: [56개월] 동생을 질투하는 언니의 마음) 편애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살 터울이 나는 아이와 똑같이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둘째도 조금 더 크면 유모차에 안 태울거고, 혼자 잘거고, 오래 못 안아주고, 잘못하면 혼날거고 등등 아기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줄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차별이라 느끼는 부분은 타이르는 것 외에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적의 좌절‘이란 단 두 단어는 그것을 실현하기까지 정말이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감정이 풀리게 된 것은 우리 부부가 같이 아이를 코너로 몰고있다는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가족들의 경우 대체로 엄마가 혼내면 아빠가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양쪽 모두가 아이를 혼내고 있어 마음 둘 곳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물론 혼내는데 성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진 않지만, 처벌과 위로의 순환 과정이 막혀 억울함이 배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거기에 구역장님은 본인도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나, 피해를 주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처럼 참지 못하는 (나 같은 성격인) 데, 남편의 경우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무리 말이 되지 않더라도 아이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무조건적으로 믿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도 이해되진 않지만 남편이 그런 마음으로 받아주고 있다고 하니, 아이들이 얼마나 든든하게 여길지 갑자기 확 이해가 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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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첫째가 엄마한테 자기도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하느냐고 울면서 항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기도 노력 중이라는 것이다. 이 고민이 과연 아이만의 것일까? 어쩌면 (우리도 잘 못하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밀어붙여 왔던 것은 아닐지,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회복된 기분을 안고 아이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해줘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 표지 이미지 : 잘 맞을 땐 사이좋은 자매
자녀들을 이해하고 잘 키우고자 하는 그 마음을 아이들이 잘 알아서.. 바른모습으로 지혜롭게 예쁘게 잘 자라는 자매 되길 기도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