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결합 구조와 정신의 유사성,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 사토 겐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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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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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작은 물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

어렸을 때 현미경을 보면서 종종 내 눈이 세상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게 되면 어떨까? 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젓고 말았던 것은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섰기 때문이다. 이런 현미경과는 비교도 안되게 작은 크기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작은 단위의 물질을 다루는, 흔히 화학자로 대표되는 이 책의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유기화학 연구자라고 하는 다소 생소한 직업을 갖고 있는 그는 이전 책 『탄소 문명』을 통해서도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물질들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다뤘던 물질이 탄소를 토대로 한 식품, 에너지 자원 쪽이었다면, 이번 책은 금속, 섬유 등 생활적인 측면에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료들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 책은 『회복탄력성』에 이어 서평단 활동 덕에 제공받은 두 번째 책이다. 제시된 두 권 중 ‘신소재’라는 소재에 끌려 선택하게 됐는데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고, 문득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원저작을 찾아보게 되었다. 제목에 세계사, 신소재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양쪽 모두 동일했지만 한국어판에는 ’12가지’라는 문구가 추가돼 있었다. 언뜻 보더라도 『세계사를 바꾼 신소재』 보다는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가 확실히 직접적으로 와닿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미심쩍었던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흔히 ‘~을 위한 ~가지 방법’이라는 형태로 자주 목격되곤 하는 제목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그런 제목의 글들이 대체로 내용을 깊이있게 다루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재료가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는 짐짓 거창한 프롤로그의 부제를 보자니, 자기 분야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세상을 왜곡된 관점으로 바라보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마저 들었다. 물론 최근 이런 제목의 글들이 많이 눈에 띄어 갖게 된 과민반응이긴 했지만, 다행스러웠던 것은 책을 덮고난 이후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돌아왔을 때 신기하게도 그의 말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는 점이었다. 화학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시대적 요구에 극적으로 응답한 재료가 어떻게 인류 문명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켜 왔는지, 그의 담백한 설명에 충분히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재료들은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저자는 우리가 평소 신세를 지면서도 정식으로 거론된 적이 거의 없는 유기화합물의 참 모습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 책을 쓰게 됐다고 이야기 한다. 아닌게 아니라 당장 있는 자리에서 조금만 둘러봐도 유기화합물이 아닌 물건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 이미 깊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만연해 있다보니 완전히 무감각해진 듯 싶었다.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자연 재료들은 잘못 다룰 경우 곧바로 위험 신호를 보내 경각심을 일깨운다. 마치 미세먼지를 통해 비로소 깨끗한 공기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공 물질들은 우리의 욕망을 한없이 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실용성이 전보다 떨어지는 경우를 찾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개선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없다는 뜻으로, 이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 가치를 자각하기란 쉽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달리 말하자면 저자가 책을 쓴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이 책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재료’라고 하는 독특한 관점에서, 또 일반적인 연대기적 서술 방식을 벗어나 신중히 선택된 재료가 인류 문명을 어떻게 좌우해 왔는지 알기 쉽게 설명해 역사에 대한 작은 이해를 더해준 그런 책이었다. 문명이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요소 – 인재, 대중 의식, 정치, 경제 등 – 가 필요하지만 ‘시대가 원하는 재료의 등장’이 결정타가 될 수 있음을, 즉 변화의 속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임을 이야기하는 저자. 그가 꼽은 12가지의 재료들의 등장 전후를 살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크게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 글에서는 관련 내용 중 인상 깊었던 부분만 발췌해서 소개할 예정이다.)

2.1. 인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토기

그릇의 사용은 인류가 정착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수조건이었다. 다양한 그릇을 통해 물과 식량을 조리, 보존하면서 인류가 번영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전염병을 막는데도 일조했다고 이야기 한다.

점토를 햇볕에 말려 항아리 등을 만들어도 물을 담으면 녹아버리므로 실용적이지 못하다. 형태를 잡은 후 불에 구워야만 비로소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된다. 점토를 구웠을 때 강도와 내수성이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 불로 열을 가하는 행위는 … 외톨이 원자에게 그토록 바랐던 ‘짝 찾기’ 기회를 제공해준다. 열이 원자를 활발히 움직이게 해서 다시 편성하고 결합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열을 가해 표면 원자를 흔들면 새로운 원자끼리 결정들 사이에 다리를 놓듯이 결합함으로써 점토 전체 조직이 더욱더 치밀하고 단단해진다. 이것이 본래 점토 덩어리에는 없고 도자기에만 있는 견고함의 비밀이다.

pp. 44-45

한편으로 평소 왜 가열을 해야만 그릇이나 철 등의 재료들이 단단해지는지 궁금했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높은 열이 일으킨 화학 반응이 원자들을 새롭게 결합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릇의 경우 재료의 내부, 즉 점토 입자 하나하나는 각각 플러스, 마이너스 전하를 띤 원자들이 결합해 견고한 구조를 형성한 상태지만, 표면에 위치한 원자는 그럴만한 기회를 찾지 못해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를 안정화시키는 방법이 고온을 통해 입자들을 뒤흔들어 소외된 원자의 결합도를 함께 끌어 올리는 것이다.

2.2. 인류 문명과 함께 성장한 종이

인류의 문명을 존재하도록 만든 가장 중요한 재료는 아마 종이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1세기무렵에 발명되었으나 유럽은 제지에 적합한 식물을 찾기 어려워 결국 목재로 펄프를 만드는 법을 개발한 19세기 중반 무렵에야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일찍부터 종이를 접할 수 있었던 아시아 지역에 서예, 수묵화 등의 예술이 발전했던 반면 서양의 경우 조각이 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또한 8~13세기만 하더라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르네상스 이후로 주도권을 유럽에 내주게 되는데 정보의 폭발적인 대중화를 가능케 한 인쇄술을 배척 – 쓴다는 행위 자체를 신성시 해 이를 기계에 맡기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해석 때문에 – 한 것이 원인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통해 만들어내는 포도당은 그 자체로 원료가 되어 종이처럼 질긴 섬유 (셀룰로스, 포도당이 직선형태로 연결) 가 되기도 하고, 먹을 수 있는 밥알 (아밀로스, 포도당이 나선형태로 연결) 이 되기도 한다는 것에서 발명은 우리가 하지만 역시나 거저 주어진 무한 에너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에 문득 숙연한 마음도 들었다.

2.3. 대중음악 발전의 전초가 된 플라스틱

1950년대 이후 세계 음악계에서 스타가 잇따라 출현한 핵심 배경으로 폴리염화비닐로 만든 레코드판의 등장이 결정적이었음을 이야기 한다. 진디의 분비물을 굳혀 만든 이전의 레코드판은 무르고 쉽게 마모되는데다 대량 생산도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와 견줄만한 스타들이 이전 시대에도 분명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의 음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알려질 수 있느냐를 결정한 것은 분명 새로운 재료의 등장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안정성을 확보한 재료의 대량생산’이 대중성의 토대를 이루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이유였다.

이밖에도 로마가 천년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강력한 배경이 된 탄산칼슘과,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겨우 수십년 만에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이끈 제사업 (누에를 통해 얻어낸 명주실 –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단백질 – 로 1922년 일본 총 수출액의 48.9%를 차지) 등 저자가 소개하는 재료의 위력은 그동안의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기에 충분했다.

3. 물질을 닮은 정신 세계

재료가 되는 물질은 그 수준을 원자 단위로까지 파고 들어가야 화합물의 구성요소들의 결합 방식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이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앞으로 문명을 변화시킬 새로운 재료를 찾는 것은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물질 세계의 결합 구조를 밝혀낸 화학의 공헌을 기초적으로나마 잘 알 수 있었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전달한 좋은 책이었다. 한편으로 이처럼 물질이 결합된 ‘구조’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정신분석이 인간 내면을 바라보는 것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분석에서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드러난 것(증상, 곧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닌 그것을 있게 한 근본 원인, 즉 구조를 밝히는 것에 있다. 탄소의 결합 방식에 따라 다이아몬드와 석탄이 나뉘듯, 부모 또는 돌보는 어른이라는 공통 원자와 아이의 결합 방식이 아이를 단단하거나 연약한 가운데서 자기 모습을 만들어 가도록 이끌게 된다. 물질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 구조를 먼저 유연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하듯, 아이를, 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려면 그의 내면에 형성된 구조인 부모의 역학관계를 밝혀내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실생활에서 가치있게 활용되는 금속은 원래 상태 그대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금속 자체가 안고있는 약점을 보완해 줄 다른 재료를 만나야만, 그것도 그냥 만나는게 아니라 아주 뜨겁게(?) 만나야만 고착된 분자 구조가 유연해져 다른 분자를 받아들일 수 있고 이 때문에 지금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물질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성장 과정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순수한 자기만족의 상태, 라깡식으로 상상계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몫을 다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도, 알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결여, 한계를 인정하고 주어지는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탄생하는 욕망의 길을 찾아야만 삶은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녹는 경험, 즉 주체가 분열되는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우리는 이질감을 주는 재료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때로는 고온의 제련 과정을 통해 점차 세상에 가치있는 화합물이 되어가는 지난한 여정을 거치게 된다. 이 책이 준 작은 교훈이 있다면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때로는 이질적인 대상들을 수용하는 것이 세상에 가치 있는 재료를 발견하기 위한 화학자들의 시도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물이 담겼을 때 융해되는 토기가 아닌 이를 넉넉히 담을 수 있는 도자기를 위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삶의 은유였다.


*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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