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묻게되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 였는데, 많은 분들이 적어도 삶의 이유에 있어서 만큼은 일관된 답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만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주변을 둘러봐도 스스럼없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거나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에 대해 저자는 책의 서론에서부터 반대 의사를 밝힌다. 우리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이다. 음… 물론 행복과 관련해 넘쳐나는 메시지들을 통해 나름의 생각들을 갖고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안다’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주장들이 혼재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게 현실적인 어려움이지 않을까?
주어진 선택지 중 이 책을 이번 달 리뷰 도서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문화심리학자’라는 저자의 독특한 연구분야 때문이었다. 물론 ‘문화’라는 용어가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어서 자칫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심리학의 어려움을, 역사 전반을 아우를 문화라는 흐름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면 분명 새롭게 와닿을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은, 저자가 행복에 이르는 핵심 줄기를 기준 삼아 다양한 잔가지들(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들)을 인문학적 시각에서 의미있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1. 제목의 의미
일단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제목부터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휘바(좋다는 뜻)’를 통해 각인된 북유럽 향기가 물씬 풍기는 단어 ‘휘게’는 편안함, 따뜻함, 안락함을 뜻하는 덴마크, 노르웨이어 명사라고 한다. 즉,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것으로,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우리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몰라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즉, 소확행을 알지만 여전히 불행하다는 것은 이러한 방식의 삶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반어적 질문인 것이다. 우리가 행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너무 직접적으로 꼬집지 않기 위한 배려(혹은 세련된 방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2. 행복에 대한 오해들
2.1. 단기적 쾌락과 장기적 행복의 혼동
그렇다면 저자가 보기에 우리가 행복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 행복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행복이라는 상태를 어떻게 설정해놓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행복을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긍정적 정서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평소에 ‘나는 행복하다’고 지각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p. 25
지속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는게 행복한 삶이라 여겨온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양적인 기준에 집착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 지적이었다. 저자는 여기에 설득력있는 설명을 더해준다.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권 사람들은 일시적인 감정도 행복의 중요한 척도로 평가하는 반면,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삶 전체, 또는 오랜 기간을 두고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이다. 더불어 정서적인 표현을 자연스럽게 하기 어려운 억압적인 분위기도 지적한다. 물론 두 가치판단은 상대적인 것으로 우열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인생의 본질이 ‘삶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었다. 흔히 부정적인 정서라 여겨지는 불만을 가진 지금의 상태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닌 이유는 이를 어떻게든 해결했을 때 주어지는 만족감이 더 큰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불만을 가진 이들만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가장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 ‘부정적인 정서가 나쁘다는 오해 (긍정적인 정서를 최대한 많이 경험해야 된다는 강박)’는 사실상 성장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저자가 ‘노오력이 부족’함을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행복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잡혔으면 하는 마음에서,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이 행복한 상태가 아님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확행, 욜로적 삶에 대한 그의 태도는 확고하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도 일시적인 활력소로써의 의미는 존중하되, 이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임을 언급하고 있었다.
포기는 행복을 얻는 방법이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하는 것이지, 발버둥 쳐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테니 포기하고 지금 상태에서 행복할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다.p. 146
2.2. 비교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오해
타인과의 비교를 유별나게 많이 하는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반발로 비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시켜 왔다. 이는 사실 필자의 이야기기도 한데,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만 해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유대를 맺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적절한 수준의 비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물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규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높은 목표를 향한 노력이 불행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된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데 따르는 고통과 인내로 이끄는 비교 말이다. 자기를 비하하는 수준의 지나친 비교, 또는 나보다 잘난 이들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 모두는 나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 하지만 나를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비교라면 조금은 마음을 가볍게 먹어도 좋지 않을까?
진정한 행복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지만 그 결과에 영향받지 않는 데서 온다. 이 둘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p. 159
3. 오해를 만든 원인들
3.1. 트라우마적 근현대사
사실 행복, 성장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한국 근현대사 문제를 불행의 원인으로 짚은 책은 처음 봤다. 그것도 한 두 차례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언급하는데, 개인적으로 일제시대 때 뿌리 깊이 각인된 식민주의 사관의 영향을 크게 바라보고 있어 반가운 마음이었다. 저자의 경우 부모 세대가, 필자의 경우 조부모 세대가 일제 시대를 경험했기에 체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수 십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그 상흔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특별히 해당 시기가 원인이 되어 파생된 문제 중 한 가지는 이분법적 사고다. 독립 아니면 친일, 이승만 아니면 김일성으로 극명하게 엇갈린 우리 민족은 양극단에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경쟁에서 승리한 자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계기가 여기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납득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조건’이 ‘나의 행복’을 규정짓고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적대적 혐오 속에서 승자와 패자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던걸지도 모르겠다.
3.2. 부족한 자기이해
우리는 거대한 사회구조의 희생양으로, 타인의 시선에 따른 삶을 살아왔기에 압도된 주체성을 회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아실현이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듯 이런 억압적 구조 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를 극복하고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한 삶의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극한의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고,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 이들의 삶이 결코 불행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삶을 감당케 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누구보다 분명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생사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의 삶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결과로써의 행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왜 행복해야 될까?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에 앞서 나는 대체 누구일까?
사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나답게 사는 거다…. 나답게 사는 것은 광고에 나오듯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고 싶은 곳에 여행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남들이 원하는 삶이다. 그들은 당신이 돈 쓰기를 바랄 뿐이지 당신의 자기실현이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p. 214
4. 삶의 목적 찾기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그 전에, 꼭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질문을 해야만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삶에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없듯, 애초에 목적을 갖고(알고) 태어나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일생의 중요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어려움을 견뎌내는 힘, 회복탄력성을 키우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나의 선택과 경험들이 삶에 연결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또한 이로 인한 일상의 정당성과 자신감 곧 ‘삶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외부의 시선이라는 껍질에 둘러싸여 있어 진정한 나만의 길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하듯 이는 한껏 복잡해진 사회적 시스템을 이해하고 성장하기 위한 배움의 과정으로 그 자체가 불행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언가로부터 종속된 삶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성은 이러한 기존 질서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 저자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이러한 기존 질서를 다스리는 힘(통제력)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초인’을 이야기 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행복을 일시적인 긍정적 정서 같은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인물 니체는 행복이란 ‘힘이 증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라 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을 강하고 위대한 존재로 고양시키고 싶어하는 ‘힘으로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일신의 안위만을 탐하는 인간을 ‘말세인(末世人)’이라 칭하고 내적으로 강하며 기품 있는 생명력이 충만한 인간을 ‘초인(超人, superman)’이라 했다…. 초인은 외부 상황에 쉽게 굴복하지 않고 항상 상황의 주인으로 존재하면서 상황을 압도(통제)하는 자신의 힘을 느끼는 인간이다. 행복한 사람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의 곤경을, 자신을 고양시킬 기회로 여긴다. 즉, 니체가 말하는 힘이란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실존의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낼 때 행복할 수 있다. pp. 212 – 213
5. 그래도 너무 목적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여전히 서글픈 것은 그 어떤 위인의 미사여구를 더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좀 더 노력해야 된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힘든데 쉽게 찾을수도 없고, 막상 찾아도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는 삶의 이유라는 것을 굳이 그렇게까지 찾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어쩌면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모르겠어서 저자가 주장하듯 체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하지만 소확행이나 욜로적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 선택에 나의 관심사가 투영되어 있는 것이니 이를 죄악시 여길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삶의 목적을 찾는 것은 이미 하나의 결과다. 무엇보다 나의 관심이 있는 곳, 내가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에 매진해볼 수 있다면 이미 삶의 의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고, 목적은 이러한 선택들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내면이 단단해졌을 때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늘 품고만 있다면, 충실한 삶은 반드시 우리에게 그 답을 알려줄 것이다.
문득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해 들인 노력보다 그에 대한 반응과 열매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공유해주어 감사한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일이고, 행복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처럼 고뇌에 찬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도록 이끈 힘은 책이 주는 진리의 기쁨과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이었다.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서 발견한 보물을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까워 어떻게든 잘 전해주고 싶었다. 말로 전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정리하는게 필요했고 또 이를 위해서는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 정리된 생각을 가장 정교하게 전달할 수 있는게 글 말고 무엇이 있을까? 그러니 블로그를 개설한 지난 10년 동안 ‘글을 쓰면 어떻게든 좋다’ 라는 식의 자기 암시만으로는 결코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고, 이러한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비로소 창작을 향한 발걸음을 겨우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목적이 결과라는 필자의 생각은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무언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는 못배기게 될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목적을 향한 삶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좌불안석하기 보다는 끝장을 본다는 마음으로 한껏 빠져들어가 보면 어떨까? 설령 그것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를 통해 이미 다음 선택을 위한 귀한 교훈들을 많이 갖게 되었을테니 말이다.
※ 이 책은 성장판 서평단 2기 활동으로 출판사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평의 내용은 전적으로 제 주관적인 감상임을 밝힙니다.
* 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