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을 할머니와 함께 대전의 증조할머니 집에서 묵었던 우리 딸, 덕분에 엄마와 아빠는 오랜만에 아주 약간의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던 터라 몇 차례 영상통화를 시도했고, 그 때마다 자기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잘 지내는 듯 보여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할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올라와 식당에서 아기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를 만날 수 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불쑥 물었다.
“아빠 안보고 싶었어요?”
그러자 놀랍게도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대로 울지는 않았고 이내 할머니에게 말을 걸며 화제를 돌려 그 순간을 모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할머니도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엄마 아빠 얘기를 종종했노라며, 기억을 더듬더니 이런 얘기도 했다고 했다.
“엄마가 나 잊어버렸나봐.”
이 얘기를 듣고 듣고 있던 가족들 모두가 빵터졌다고 하는데 식사를 하는 중에도 이 얘기를 해 단 하루였지만 엄마 아빠가 없는 하루가 아이에게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알 수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건 울음을 참는 태도였다. 금요일 어린이집에서도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는데 수염을 붙인게 아니라 커다란 인형탈을 써 거의 모든 여자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그나마 우리 아이는 울먹거리기는 했지만 선물을 받고 할아버지 볼에 뽀뽀도 해주고 사진까지 찍는 등 제 할 일은 다 하고 돌아왔다는데, 이후 할아버지에게 다시 가보라고 하자 결국 원망스럽다는 듯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는 아내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아직까지’는’ 아이가 울 때 뚝 그치라며 윽박지르거나 화를 낸 적이 없다. 한참을 울며 시끄럽게 해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 오를지언정 최대한 달래고 위로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감정이 차오를 때 이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때만 상처받은 마음이 진정으로 위로받을 수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은 감정의 잔여물이 나의 관심과 에너지를 계속해서 쏟게 만들어 자신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에너지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요즘 우리나라 곳곳에서 분노로 표현되는 에너지 과잉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쨌거나 그런 아이가 어느 순간 스스로 울음을 참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물론 엄마가 달래면서 도깨비가 나타난다며 겁을 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그것만이 원인인 건 아닌 듯 싶었다. 문득 떠오르는 건 아이가 요즘 자주 하는 멘트인 “용감하게 씩씩하게.” 였다. 바로 아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콩순이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이가 하는 얘기도 ‘콩순이처럼 용감하고 씩씩하게’ 이겨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슬픔의 순간 아이를 붙잡아준 건 결국 이러한 대상과의 동일시이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대상을 닮고 싶고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상징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각의 방향을 바꾸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아이에게 진정으로 가치있는 교육이 될 것이고,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우린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준 적이 없다. 단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경험적으로 제공했을 뿐. 결국 돌이켜 봤을 때 아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부모의 모습을 스스로 닮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나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 이미지 출처 : 영실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