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개월] ‘섣부른 금지나 대안’ 문제 사이에서 아이를 존중하는 방법

readelight

책보고 웃는 아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다. 대체로 귀여운 행동을 하고 있어서 일 때가 많지만, 무언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궁금해서인 경우도 있어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다. 그럴 때 급하지 않다면 아이가 힘들어 하더라도 최대한 기다리다가, 정 안되겠다 싶을 때 약간의 힌트를 주거나 결국 도움을 요청할 때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방식을 택하곤 한다.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인데 문득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지난 ‘아이를 대할 때 기억해야 할 3가지’ 글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했던 ‘긍정적 대안 제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트를 벗지 마’라는 사고를 단절시키는 금지에서 ‘코트를 입고 있어’라는 해결책은 분명 듣는 이로 하여금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기에는 또 다른 글 (‘자녀의 자율적 동기부여를 위해 부모가 해야할 일’)을 통해 언급했던 것처럼, 아이 인생에 스포일러를 제공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한 믿음을 위해 대안 제시는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내가 찾아 성취한 것’이라고 하는 자긍심이 뒷받침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만큼 대안 제시를 잘하는 나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대안의 가치 유무를 떠나 타인의 삶에 개입하기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육아를 예로 들자면, 분명 삶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에게 인생의 선배인 부모는 아이가 선택한 것보다 ‘좋다고 여기는’ 방법을 아이에게 끊임없이 알려주고자 노력한다. 정체된 성장률 속에서 소위 ‘인싸’ 되기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지고 있기에 부모의 불안감은 증폭되고, 이는 아이들을 향한 조급함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조기 교육, 사교육 열풍이 롤 모델로 여겨지면서 (아이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사실상 무한대의 대안적 삶을 제공받는 것이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이지 않을까? 물론 의식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움직임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긴 하지만, 공고한 시스템의 벽을 넘기엔 잠재된 불안요소가 너무 크다는 부담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안정된 환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는 책임을 기꺼이 감수했을 때 정당한 대가는 커녕 유전무죄 무전유죄적 정의가 여전히 판치는 사회상을 반영한다. 사실상 부모 자신도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마나 유일한 성공의 사다리로 여겨지는 교육에, 현재의 입시 관문에 점점 더 목을 멜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결국 금지든 대안이든 그것이 타인의 특정한 행동을 유도하려고 하는 한 같은 차원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지의 문제는 금지된 대상을 욕망하도록 만든다는 것이고, 대안의 문제는 주체의 능동적 사유를 방해한다는데 있다. 말 그대로 하지 말라고도, 하라고도 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지시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에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안고 아이와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끝없이 고민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시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게 현명한 걸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

무엇보다 중요하게 염두에 두고 있는 금언은 진리는 주체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주변으로부터 아무리 옳은 소리,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이 나의 상황, 생각과 공명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기존의 이해 방식을 깨뜨리는, 전혀 다른 깨달음의 때가 찾아온다.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마주했을 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삶의 무한 동력을 확보한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열정적인 탄압자에서 목숨을 내건 전도자로 재탄생시킨 보편적 깨달음의 주체 말이다.

바울의 일반적 방식은 이렇다. 즉 어떤 사건(예수 부활 사건, 필자 주)이 있고, 진리란 그것을 선언하고 그런 다음 그러한 선언에 충실한 데 있다면, 그로부터 두 가지 결과가 뒤따른다. 먼저 진리는 사건적인 것, 즉 도래하는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때 진리는 개별적이다. 그것은 구조적인 것도 아니요, 공리적인 것도, 법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작용 가능한 일반성도 그러한 일반성을 내세우는 주체를 설명하거나 구조화할 수 없다. 따라서 진리의 법이란 존재할 수 없다. 두번째로, 진리란 본질적으로 주체적인 그러한 선언의 토대에 기입되기 때문에 이미 구성된 어떤 부분 집합도 진리를 짊어질 수 없다. 어떤 공동체적인 것이나 역사적으로 확립된 것도 이 진리 과정에 스스로의 실체를 제공할 수 없다. 모든 공동체적인 부분 집합에 대해 진리는 그것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이 진리는 어떤 정체성에도 기대지 않으며, 그리고 (이 점이 분명히 제일 미묘한데) 어떤 정체성도 형성하지 않는다. 진리는 모두에게 제공되고 말 건네진다. 어떤 귀속 조건도 이러한 제공과 말 건넴을 제한할 수 없다.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pp. 32 ~ 33.

내가 무엇에 대해 확신을 갖느냐는 아무도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철저히 개인에게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개별적임과 동시에 어떤 집합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한 예외적 성격을 반영한다. 진리가 모두에게 말 건네질 수 있음은 그것이 철저히 모든 개인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으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타자에게 심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주체적 진리에도 분명 상대적 차원 (기독교를 일으킨 바울의 진리와 아이가 믿는 진리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존재하지만 그 부분은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접근해야 할 사항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하는게 중요하다는 점을 짚고 싶었다. 필자가 아이를 최대한 지켜보고자 했던 것은 아이가 주체적으로 발견한 진리에 흠뻑 취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결국 선택하게 되는 것은 의도를 최대한 덜어낸 순수한 질문이다. 요구적 지시어 (해, 하지마) 가 아닌 주체적 선택을 이끌 수 있는 마법의 질문 ‘어떻게 해보고 싶어?’로 말이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지시를 하되 반드시 이유를 설명해주는 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주체성을 보호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다. 거기에 아이의 선택이 영 이상하다면 설득을 할지언정 되도록이면 그 선택을 존중해 준다. 사실 굉장히 편한 방식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타인인 부모가 굳이 앞서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수도 있지만 오히려 부모는 부모의 삶에 충실하고, 아이는 아이의 삶에 충실함으로 개인의 책임의식을 더 키워주기 위함으로 보는게 더 적절할 듯 싶다. 그렇게 아빠는 아빠만의, 아이는 아이만의 진리를 찾아나가길, 이를 통해 오롯이 자기만의 새로움을 분출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옳은 생각이 내일 부정될 수 있는 오늘날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 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