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 성장을 이끄는 라캉의 방법, 『프로이트 · 라깡 정신분석 임상』, 조엘 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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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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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라깡을 더 알고 싶었을까?

책을 읽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 때가 있다.

평소 궁금했던 것을 명료하게 해결해주는 글을 만나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그렇다. 하지만 뭐랄까, 보다 깊이있는 감동을 주는 것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듯 싶다. ‘이걸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지?’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도록 만드는 글, 그것은 이미 익숙했던 것조차도 전혀 새롭게 와닿게 만드는 ‘신선한 표현’을 통해서였다. 시는 학자들 사이에서 최고 수준의 글쓰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보거나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곳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을 문자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관통하는 서정적 표현, 시의 예술성이란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의 여운을 제공하는데 있는 듯 싶다. 내게 있어 이런 느낌을 주는 글들을 돌이켜 보면 주로 저자가 프랑스 학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확실히 사유에 있어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어서인지 글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탁월한 표현에 자주 감탄하곤 했었다. 물론 같은 말을 번번히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내 이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어려움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꼭 프랑스 학자가 아니더라도 글을 통해 그러한 느낌을 받을 때는 그 가운데 십중팔구 라깡이 자리하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도 모두 라깡주의 정신분석 학자들이 쓴 책 (『강박증 : 의무의 감옥』, 『라깡과 아동 정신분석』) 이었고, 『사도바울』을 쓴 알랭 바디우 또한 (라깡을 아주 잘 아는) 세계적인 프랑스 철학자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다루고자 하는 슬라보예 지젝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나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이끈 것도 실상은 이들의 글 속에서 손짓하고 있는 라깡의 언어 때문이었다. 앞으로 서평단 활동을 통해 한 달에 한 번은 조금 더 일반적인 책에 관한 글을 쓰겠지만, 아마 그 외의 글들은 모두 라깡을 알아가는 오랜 여정에 할애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인 조엘 도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라깡주의 정신분석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라깡이 사망한 해인 1981년부터 세미나 모임을 결성해 일반대중과 전문가들에게 라깡 이론의 전체적인 모습을 종합적으로 전달하고 ‘접근이 어렵기로 유명한’ 라깡 저작 독해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선구자[1]라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글들은 라깡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해주었는데, 라깡의 생각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기에는 나의 배경지식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라깡을 다루는 저자들의 부연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수수께끼 같은 그의 표현을 온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내면의 이해에 있어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로와 더불어 언제나 음미할 여지를 마련해 주는 메시지의 특별함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세계적인 학자들로부터의 끊임없는 구애 (잦은 인용, 곧 인정받은 권위) 와 핵심을 관통하는 명료함, 그리고 신선한 표현방식의 발자취를 묵묵히 따라가 보고자 한다.

2. 라깡주의 정신분석은 어떻게 주체를 탄생시킬까?

2.1. 가르침의 문제

정신분석은 19세기 말 최면 상태에서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연상 기법을 통한 자연스러운 ‘듣기’를 무기삼아 탄생하게 된 학문이다. 『꿈의 해석』 및 그 이후의 저서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 프로이트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환자들의 표현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해석’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저자가 초반부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분석의 출발점에서 비롯된다. 정신분석이 과연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당시 회자되었던 ‘정신분석은 가르쳐짐이 아닌 전달되는 것이다.’ 라는 금언은 저자에게 편견으로 가득한 표현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데, 둘을 대립시키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론적 가르침만 강조하는 것은 환자로 하여금 심리치료 차원의 교리적 처방에 종속되게 할 위험이 있으며, 임상적 가르침 (전달) 만 강조하는 것은 순수한 감정이입, 즉 공감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되어 증상의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는 (비의적) 문제를 안게 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정신분석은 분명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지만 반드시 전달의 과정이 선행 되어야만 함을 이야기 한다. 달리 말해 정신분석 상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깨우친 자, 곧 정신분석이 발견한 ‘주체의 진리’를 몸소 체험한 자들만이 가르침을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분석 경험은 결코 객관화 될 수 없다. 그것은 그 심장부에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진리의 출현을 포함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신화는 진리의 정의 속으로 전달될 수 없는 무언가에 담화적 공식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진리의 정의는 오직 자기 자신에 근거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pp. 62-63

인간에게 있어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를 근거짓는 것은 언제나 그를 이끄는 욕망과 관계된 어떤 것이다. 자신이 동경하는 신화 속 영웅을 현실 속에서 찾아내 그 힘을 내면화하고자 하는 것, 즉 주체적 진리는 이처럼 상호주관적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주체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은 타자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전에 리뷰했던 『라깡과 아동 정신분석』에서는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알제리 태생의 사미라라는 아이의 사례가 나온다. 친오빠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그것이 범죄인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해왔던 8살의 가여운 아이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너를 죽일 것이고, 어머니는 이로 인해 슬퍼서 죽을 것이라는 언니의 협박을 받는다. 아이의 증상은 이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던 중 남자 아이가 벽을 넘어왔을 때 자신이 더 이상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2] 일반적으로 어른들은 이 사건만으로 여자아이의 처녀성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사실상 본인의 고백 외에 처녀성을 알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긴 한걸까?)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우리를 구성한다는 잔인한 진실이 반드시 먼저 드러나야만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아이가 갖고 있는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교정해 줄 수 있을까? 흔히 부모들이, 혹은 윗 사람들이 가장 고민하게 되는 이 지점에서 바로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인 전이가 출현하게 된다.

2.2. 프로이트의 전이

무의식적 표상은…… 이미 존재하는 중요하지 않은 어떤 표상과 결합하는 경우에만 전의식으로 뚫고 들어올 수 있다. 거기[중요하지 않은 어떤 표상]에 무의식적 표상은 자신의 강도(强度)를 전이하며(transfère), 무의식에 대해 가면의 역할을 한다. 바로 이것이 전이 현상이다.[3] p. 106

증상을 일으킬만큼 강렬한 환자의 외상적 사건은 그의 생각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 당시 상황을 상기시키기 매우 어려운 것처럼, 사건이 주는 강도가 강할수록 감정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게 (억압되게) 된다. 이때 괴로움을 중화시키기 위한 대상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의 감정을 떠올리지 않게 할만한, 곧 ‘중요하지 않은 어떤 표상’이다. 덕분에 ‘마치 그것이 아닌 것처럼’ 환자는 당시의 기억을 의식의 수면 위로 조금씩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의 고통의 짐을 나누어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전이인 것이다. 그렇게 프로이트에게 있어 전이는 무의식의 접근수단으로 반복을 통해 분석가에게 전달, 환자의 욕망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도구가 된다. 한편으로 분석가의 욕망의 영향, 곧 환자를 자신의 욕망에 종속시키는 것을 특히 경계한 그는 이후 저항의 궁극적인 원인이 분석가 자신에게 있다는데까지 그 의미를 밀어붙인다. 이에 대한 라깡의 정식화는 다음과 같다.

분석가 자신 이외에 분석에서 다른 저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p. 109

2.3. 라깡의 전이 분석

프로이트 이후 상상적 부산물로만 치부되던 전이는 라깡으로 인해 그 중심적 가치를 회복하게 된다. 라깡의 전이에 있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환자의 요구와 욕망을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담자는 분석가가 가지고 있다고 가정된 어떤 것 (욕망의 원인, 대상 a) 을 ‘요구 (전이)’ 한다. 하지만 이는 분석가를 통해 실현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착각으로, 상담자에게 요구하는 것 그 자체로 이미 그의 욕망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낼 따름이다.

자신의 욕망이 지닌 진실이 타자가 보유한 지식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요구와 욕망을 혼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전이의 분석만이 그러한 가상(semblant)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데 분석가는 자신이 환자를 대신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환자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떤 해석도 제시할 수 없다. 분석가는 전이 속에서 무의식적 지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주체 [분석 주체]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지식의 보유자가 될 수 없다. p. 113

여기서 ‘전이의 착각’은 분석가가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상담자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발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존경할만한 대상이 아니라면 전이의 요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으로써의 전이, 곧 분석가의 욕망과 환자의 욕망간의 결합에 대한 긍정[4]으로 함께 춤추는 가운데 가정된 주체였던 분석가(대타자)가 실은 환자 자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 그의 결여에 대한 인정으로 점차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상징화의 과정, 곧 대타자 거세에 대한 지식의 은유(S(A/))이다. 그렇게 가정된 상상이 실은 두 사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제 3의 구성요소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전이 분석이 나아가는 깨달음의 방향인 것이다. 이후 자기 욕망의 원인이 이미 자기 자신에게 있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결국 분석가는 오물처럼 거부되며 치료는 종료 시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환자가 요구하는 것에 그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는 진실은 라깡으로 하여금 환자를 단순히 피분석자가 아닌 분석의 주인 (분석 주체) 으로 격상시키도록 이끌었으며, 분석가의 욕망이 투사되지 않도록 순수한 전달을 통한 가르침으로의 나아감, 곧 저자가 해법으로 제시한 ‘작업적 전이’를 가능하게 했다.

2.4. 개입과 해석의 황금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이를 통해 차차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음을 깨닫고 계속해서 도전하게 되는 것이 라깡주의 정신분석의 오랜 여정이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전달과 가르침의 미묘한 줄타기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다. 전이에서의 핵심을 둘(요구와 욕망)로 나눴듯, 가르침의 문제에 있어서도 라깡은 개입과 해석의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개입은 치료 과정에 있어서 규칙적으로 이뤄지는 동반절차[5]이다. 그것은 환자 자신의 심리적 구성을 탐지하고 상상 속에 머물러 있는 표상을 명확하게 만들어 왜곡된 환상이 점차 해체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즉 환자가 얽매여 있는 환상의 기본 구조를 제거해 환자 자신이 오해하고 있었다고 여기는 무지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해석에 대한 설명과 비슷한 듯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개입은 결코 환상의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즉,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고 주체가 스스로 가정할 수 있도록 이끄는 촉매제 역할만 함으로써 ‘여지’를 남겨놓을 뿐이다. 이 과정은 상담회기 내내 지속되며 분석가가 일관성있게 견지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해석은 말 그대로 직접적으로 설명하여 환자의 생각을 단절시킨다. 즉 분석 주체가 명백히 오판하고 있는 순간에 그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개입하여 생각의 연결고리를 끊어 놓는 것이다. 마치 잘려진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속적이기만 했던 두 표면이 비틀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관계맺도록 이끌기 때문에 주체는 분열될 수 밖에 없다. 해석이 특정 시기에 아주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이에 대한 분석가의 욕망의 응답 즉, 상상 속 종속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자유연상 기술과 해석의 원칙을 통해 꿈풀이 사전처럼 일원화된 뜻에 주체의 무의식을 도입해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주체성이 배제된 해석은 다시금 자명성의 원리, 즉 메타언어의 문제로 이끌어 주체를 분석가의 진리에 묶어놓게 된다.

3. 증상에 대한 라깡의 설명

본 책의 1, 2부가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내용이라면 3부는 임상 사례를 통해 증상을 설명하는 장이다. 이 글을 통해서는 저자가 설명하는 증상의 핵심적인 요소만 짚어볼 생각이다.

3.1. 히스테리

흔히 여성적 증상으로 대표되는 히스테리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양가성 (애매함) 을 특징으로 한다. 한편으로는 무능한 아버지(여자라는 적의 희생자)로 인한 연민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아버지(어머니, 딸을 파멸시키는 폭군)로 적대적 태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시기 별로 아버지 존재 가치가 변화함에 따라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종속되는, 즉 자기 욕망을 포기하며 타자 욕망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가동시키는 애처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저자의 임상 사례에서도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 어머니를 대신해 청소년기의 딸에게 갑작스럽게 관심을 표현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하지만 단순한 관심 정도를 넘어 타인들로하여금 여자친구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으나, 아버지를 찾아 자신의 집으로 온 여학생으로 인한 배신감으로 불쌍한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처럼 히스테리 환자가 자신의 욕망을 살지 못하도록 이끈 것은 부모, 특히 아버지의 무의식적 (경계를 허무는 근친상간적) 조종 때문이었다. 결국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아버지는 자신을 분노케 한 딸을 강간하고자 하는 상황까지 나아갔으며, 힘들었지만 장기간의 상담을 통해 부모와의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점차 자신만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었다.

3.2. 강박증

『강박증 : 의무의 감옥』을 통해서 자녀를 통해 아버지의 질투를 유발하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즉, 아버지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렇지 못해 아이가 그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증상의 배경보다는 그 특징에 초점을 두고 설명한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법을 제정하기까지 하는 어머니의 전능한 통제는 자녀로 하여금 끝없는 위반의 환상을 창조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위반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도착증자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은 그가 대타자인 어머니의 법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에 있다. 자신의 생각, 태도, 행동을 그 논리적 맥락과 ‘격리’시켜 정서적 고통을 중화시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진 질서를 통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데 매우 능한 그는 정서를 철저히 배제한 날카로운 관찰이 가능하다는 현대적 장점(동시에 위험이기도 한)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사후적으로 취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는 사랑과 증오의 원초적인 대립 속에서 사랑의 긍정적인 측면마저도 왜곡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도 타자의 욕망이 자기에게로 향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를 회피하고자 노력하게 되며, 저자는 이를 보다 극단적으로 시체가 된 여성 (더 이상 환자를 욕망하고 요구할 수 없는) 만이 강박증 환자를 안심시킬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3.3. 공포증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즉 근친상간 금지의 상징화는 아버지의 법을 경유해서만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다. 마치 분석의 과정처럼 최초 실재적 아버지를 보며 그가 팔루스라는 ‘안다고 가정된 무엇’을 갖고 있음을 발견(상상적 아버지)한 후 그의 한계(법의 창시자 아닌 대리자일 뿐임을 자각, 곧 대타자의 결여)를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상상적 결합에서 분리된 아이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공포증은 상징화의 과정에서 라깡의 표현에 따라 상상계와 불안의 결합으로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정 이미지와 우연적으로 결합되어 (한스의 말, 저자 환자의 정액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증상을 형성하게 된다.

3.4. 도착증

소위 바바리맨처럼 변태의 대표격으로 취급받는 그들의 심리 속에는 어떤 구조가 자리잡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에게 해를 끼치기 위함이 아닌 ‘위반’ 자체를 향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의 페니스 부재로 고통받으며 거세공포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그의 메타심리학적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자에게 존재하지 않는 페니스, 곧 상징적으로 팔루스를 보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제약없는 성애적 유혹, 자극 (보기, 듣기, 만지기, 느끼기) 과 아버지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함, 그리고 아버지 자신의 방조적 태도가 아이로 하여금 규범에 ‘도전’하고자 하는 태도를 낳는다. 강박증의 경우처럼 어머니 스스로 법을 세우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법을 여전히 참조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표상에 고착되어 아버지를 경쟁자이자 침입자로 여기며 어머니의 거세를 부인하게 된다. ‘나는 물론 (어머니가 거세되었다는 것과 아버지를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맥락에서 말이다. 도착증 환자가 갈등을 겪는 것은 어머니 뿐이다. 아버지의 상징적 말의 중개인인 위협적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조롱하고 한계를 넘어선 유혹으로 자극하는 어머니가 그것이다. 결국 상징계를 향한 ‘결여’를 제 때 수용하지 못한채 이중의 향유 가운데서 갈등하던 아이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을 계속해서 확인하고자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4. 도전이 내면화 될 때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다시 한 번 자문해 보았다. 나는 왜 라깡을 더 알고 싶었을까?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마치 라깡을 알고 싶다는 요구 속에 나의 주제인 성장을 향한 욕망이 담겨있음을 글쓰기라는 작업의 전이를 통해 깨닫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3주 동안 씨름하고 있었으니 생각이 숙성되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긴 했다. 그렇게 맥락을 추리고 추리면서 나름 선명하게 드러난 구조를 통해 바라본 라깡주의 정신분석에 대한 결론(이 책에 한정지어서)은, 그것이 매우 구체적이고도 섬세한 멘토링 프로그램이라는 점이었다. 나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은 여러가지겠지만 그것은 환상이라는 내면화 된 방식으로 욕망을 추동시킨다. 신기한 것은 결여의 과정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하는 도전을 앞두고 한계에 직면하는 상황에서 멈춰 섰을 때 (고착 되었을 때) 다양한 증상이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멈춰진 생명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대상을 통한 과거의 재해석이 필수적이다. 동경하는 대상으로부터의 개입적 지지, 때로는 따끔한 직언인 해석을 통해 삶이라는 것이 내가 경험해왔던 것만큼 두렵고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전이를 통해서만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의 왜곡된 상상을 가로질러야만, 즉 실패를 경유해서만 주체성의 진리를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상상이 없이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시작조차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나를 알아가기 위한 중요한 자료를 이미 갖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삶의 이유를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1]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 I』, pp. 7-8 (역자 홍준기 박사 서문 인용)
[2] 카트린 마틀랭, 『라깡과 아동정신분석』, pp. 135-136
[3] p. 106 (본문 내 재인용) 프로이트(S. Freud),「꿈 과정의 심리학(Psychologie des rêves)」(4장),『꿈의 해석(L’interprétation des rêves)』(1899), 메이에르손(I. Meyerson) 옮김,베르제(D. Berger) 편집 , 파리: 퓌프(P.U.F) 출판사, 1967, pp.478~479.
[4] p. 114 (본문 내 재인용) 라깡,『정신분석 의 네 가지 근본 개념 (Les quatr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세미나 11 권(1964),파리: 쇠이유 출판사,1973, 1964년6월 17일 세미나.
[5] 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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